고난 통과하면서 철든 그리스도인이 되다

너무 일찍 마주친 고독과 절망/공부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

너무 일찍 마주친 고독과 절망
김인강 교수가 11세에 겨우 학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나 놀라게 된다. 두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걷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인강이 갖다 버려, 파묻어버려”라며 가족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러 갔을 때 어머니 등에 업혀 “이렇게 불구가 심한 학생은 받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입학을 거부당했다.

6남매 가운데 막내였던 그는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치고, 혼자서 계산법을 익혔으며 집안일 돕느라 바쁜 둘째누나의 산수 숙제와 글쓰기, 그림그리기와 만들기를 도맡아 해주었다. 형과 누나들이 읽던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며 어린 시절을 거의 방 안에서 지냈다.

그에게 다가온 첫 번째 전환점은 둘째누나가 마련해주었다. 누나의 후원으로 열한 살에 대전 성세재활원에 입소한 것이다. 3학년에 배정받아 치른 첫 시험에 서 1등을 한 그는 친구들에게 산수를 가르쳐 주고 구내매점에서 계산을 도울 정도로 총명했다.
100여 명의 원생이 단체생활을 하는 재활원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지만 매주 자취방으로 데려가 씻겨주고 재활원 경비를 부담하는 누나와 논산 집에서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견뎌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원생들과 부모에게 버림받아 시름시름 앓다 죽는 원생들을 보며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곤 했다.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예배에서 목사님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면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아이들을 이렇게 버려두시나’ 하는 생각에 반감만 들었다고 한다.
근육이 오그라들고 허리까지 굽었던 그는 힘든 재활을 거쳐 6학년 때 보조기를 끼고 목발을 짚을 수 있게 되었다. 매일 2㎞쯤 되는 둑길을 걸으며 보행 연습을 하였고, 그때부터 목발이 다리를 대신해주고 있다.

공부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
6학년 때 일반학교에서 자원하여 재활원으로 옮겨온 최화복 선생이 소년 김인강에게 두 번째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외부에서 일반학교 시험지를 구해와 저 혼자 시험 보게 했어요. 시험지마다 100점을 맞자 ‘너는 공부를 잘하는 재능이 있다’고 하시면서 일반 중학교에 진학해 끝까지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누나는 진학보다는 재활원에 계속 머물며 기술을 익히라고 권했다.
“장애 때문에 취업이 어려울 테니 목각이나 인쇄, 편집 기술을 배워 자립하라는 얘기였죠. 어렸으니까 공부를 해야겠다는 각오 같은 건 없었어요. 최화복 선생님이 누나와 어머니를 설득해주셔서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죠.”
중학교에서도 “계단이 많아 이런 학생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최화복 선생은 “이 학생 안 받으면 후회할 거다. 얘가 나중에 학교 이름을 날릴 테니 두고 보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김인강 교수는 훗날 두 자녀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한 최화복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대전중학교와 충남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하지만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집안이 가난한 것도, 아버지가 술 마시고 가족들을 괴롭히는 것도 여전했다.
“사회도, 내 인생도 부조리하다는 것과 함께 왜 태어나서 서로 정죄하며 살까, 그런 복잡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불쌍한 재활원 친구들이 떠올라 대상이 없는 분노에 시달렸죠. 그러면서도 여러 사람의 희생을 딛고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하며 버텼어요.”
갈등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서울대 수학과에 합격했다. 육체적으로 힘을 써야 하는 학과, 실험을 해야 하는 학과, 나중에 임용이 안 될 것 같은 분야를 제외하다가 선택한 학과였다. 신림동 고시촌의 지하 단칸방을 얻어 어머니와 함께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수업을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이동이 힘들었죠. 남들은 5분이면 가는 거리를 저는 15분 걸려야 갈 수 있고 계단이라도 있으면 30분이 걸렸어요. 다음 수업 장소로 이동할 때 가방을 부탁하면 대부분 들어주어 도움이 되었는데 어느 날 ‘그런 건 스스로 해결하라’는 말이 날아왔어요. 동정 받는 건 싫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당연시 하며 살아왔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날로 큰 백팩을 구입해 메고 다녔다. 무겁고 피곤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가능한 한 모든 일을 스스로 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뭐 하러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나, 하는 회의가 들었고 ‘인생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이 짧다는 게 우리의 희망이다’라는 세네카의 말에 위로받곤 했다.


(글/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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