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두려움’은 무엇인가

두려움을 내어쫓는 온전한 사랑

신앙계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잠식하고 있는 이 두려움은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사탄은 침투하여 두려움을 심는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진리마저 부정하려 든다. 특히 현대인들에게 두려움이 많은 것은 과학만능주의로 인하여 과학이 우상이 되어 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이유도 큰 몫을 담당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의 증명을 최우선으로 삼는 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부인하게 만들었고, 아울러 정신세계 안에서 신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부인하므로 인해 되어진 놀라운 결과는 믿음이 없어진 자리에 두려움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세상의 모든 것을 불신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에 보여야만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는 과학시대에 인간은 현미경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었고 전자현미경과 우주천체망원경으로 이제 보이지 않는 세계마저 정복했다고 신의 자리에 앉아 쾌재를 부르며 의기양양하게 됐지만 알면 알수록 알지 못하는 세계가 더 많음에 인간의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채로 더욱 의심과 두려움만 증폭됐을 뿐이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요일 1:18)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두려움이 없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힘을 입은 신앙의 많은 선조들이 복음을 위해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다.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며 두려움의 왕인 죽음을 향해 호통쳤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도 기꺼이 목숨을 바친 사랑의 힘이다. 사랑은 죽음마저 뛰어넘고 모든 두려움을 잠재운다.

필자는 젊은 시절 목사로 부름받기 전에 외항선 항해사로 먼 바다를 돌아다녔다. 바다생활은 항상 죽음의 공포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 두려움 가운데 깨달은 것이 있다. 태풍이 몰아칠 때 태풍의 주변 언저리는 요동이 심한 반면, 정작 그 중심인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는 것이다. 고난의 시기에 두려움과 맞서기 위해서는 고난의 현장, 그 두려움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거기에 갈보리 십자가가 서있다. 그리고 십자가 바로 밑, 그 십자가 그늘 아래 두려움 없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내가 쉴 수 있는 참된 안식이 있다.†

조규남 (목사)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기독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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