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순천, 내 영혼은 한국인입니다

내 이름은 짠이

인요한 소장의 어린 시절 가족사진. 어머니 로이스 린튼이 안고 있는 아이가 막내 인요한이다.

인요한 소장은 1959년 12월 8일에 전주의 예수병원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사역하던 순천으로 옮겨져 자랐다.
“우리 형제는 5남 1녀입니다. 셋은 미국에서 낳아 데리고 들어왔고, 셋은 한국에서 낳았습니다. 큰형 데이비드 린튼은 미국 시카고에서 활동했고 둘째 형 스티븐 린튼은 유진 벨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1990년대 초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 겸 고문으로 5년 동안 북한에 드나들면서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나 만났습니다. 이후 북한 의료지원 일을 주도하면서 북한 결핵퇴치사업에 앞장섰습니다. 셋째 형 제임스 린튼은 건축가로 북한 선교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고 유일한 누나인 마리아 린튼은 전업주부로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좋아해 자식을 11명이나 낳았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넷째 형 앤드류 린튼은 금융계에서 일했고 제가 막내입니다.”

어린 시절의 인요한은 엄청난 개구쟁이로 동네에서 유명했다. 어른들은 파란 눈 아이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자기들끼리 으레 한두 마디 나누었다.
“아따, 이놈 미국 넘 같은 디, 때때옷을 입어 붕께 솔찬히 이쁘구만이~.”
얌전히 있으면 예쁘다는 소리나 듣고 말텐데 어린 인요한은 참지 못하고 꼭 말대꾸를 했다. 그가 버릇없어서라기보다 자신을 다르게 보는 게 싫어서 그랬다.
“이놈이 머여, 내 이름은 짠인디.”
그러면 어른들은 허허 웃다가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허허, 요놈 봐라. 한국말을 잘 허네. 근디 요놈이 어른헌테 막 대드네이.”
“그 당시에 사람들과 친구들은 저를 부를 때 ‘짠이’라고 불렀어요. 미국 이름 ‘존’의 전라도 버전으로 ‘짠’이 된 것이지요. 여름이면 동천에서 물장구 치고, 고기 잡고 가을에는 앵두, 수박, 감도 서리해 먹기도 했습니다. 겨울이면 쥐불놀이에 고드름 따먹고 친구들과 칼싸움하며 놀았지요. 한 친구네 집이 건어물 가게를 했는데 그 시절 오징어와 멸치를 늘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때 저는 세상을 다 가진 아이였고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배우는 소중한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함께 놀았던 순천 친구들을 만나면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아 매우 즐겁습니다.”

그가 의사가 된 계기도 순천에서의 추억에서 비롯됐다. 어머니가 결핵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다. 또 어린 시절, 다친 염소들을 치료소로 데리고 온 할아버지 한 분이 어린 인요한에게 질문을 했다.
“짠이야, 아픈 동물들이 불쌍허냐?”
“야, 불쌍해 보이지라~”
“그런데 사람은 더 안 불쌍허냐? 의사가 되는 것은 으떠냐?”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연세대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의학공부는 쉽지 않았습니다. 또 한국사와 한자는 정말 어려웠지요. 나중에 의사국가고시 시험 볼 때 막막했습니다. 몇몇 과목 시험 문제에 한자로만 문제가 나왔어요. 그래서 시험보기 전 전공서적은 안 보고 한자공부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험 일주일 후 학과장님이 저를 불러서 축하한다고 하셨어요. 날아갈 듯 기뻤지요. 그리고 곧바로 미국에서도 의사자격을 얻기 위해 뉴욕으로 갔어요. 미국에서 4년간 의사로 일했어요. 미국 생활에 적응했지만 고향 순천이 눈에 어른거렸지요.
게다가 미국에서는 김치를 먹기가 힘들었습니다.(웃음)”

인요한 소장은 최초의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 보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의 아버지 사고와 관련된 슬픈 사연이 있다.
“1984년, 제가 대학교 2학년 때였어요. 어느 날, 어머니에게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정신이 아득했어요. 세상에 이보다 더 나쁜 소식은 없었을 거예요. 급히 순천으로 내려갔어요. 아버지는 당시 짓고 있던 교회 건축에 쓰일 자재를 싣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음주음전을 한 관광버스가 들이받아 차에서 튕겨나갔다고 해요. 의식불명 상태였고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지요. 당시 순천에는 앰뷸런스가 없었어요. 택시를 타고 광주기독병원으로 가는 중에 아버지는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지금만 같았어도 생명을 잃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때 한국의 응급의료체계를 혁신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온 힘을 기울여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었고, 이를 널리 보급시켰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우리 가족과 순천 일대 교인들에게 큰 슬픔이었지만 훗날 우리나라의 응급의료체계의 기틀이 다져진 것을 생각하면 이 또한 하나님의 또 다른 소명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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