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순천, 내 영혼은 한국인입니다

한국을 자신의 목숨만큼 사랑한 한국인보다 인요한 소장의 선대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인요한 소장의 아버지, 휴 린튼

“아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앞에 순천에서 올라오신 목사님하고 얘기가 조금 길어져부렀소~.” 약속 시간을 조금 넘겨 만난 인요한 소장이 사투리가 섞인 유창한 한국말로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여기 국제진료센터에서 91년부터 장기집권(?)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직원이 4명이었는데 현재는 50명이 넘습니다. 한 해 외국 유학생 3만 명, 외국인 6만 명이 우리 병원 국제진료센터로 찾아옵니다. 점점 그 인원이 늘어나고 있어 요즘에는 해외환자 분들에게 특화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인 소장은 한국인이면서 미국인이다. 2012년 특별귀화법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한국과 미국 국적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인요한 소장의 선대는 한국을 자신의 목숨만큼 사랑한 분들이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이다.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 유진 벨 선교사가 그의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이며, 스물두 살의 나이에 한국에 와 48년 동안 의료와 교육 선교 활동을 한 윌리엄 린튼 선교사가 할아버지, 군산에서 태어나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600여 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휴 린튼 선교사가 그의 아버지이다.

19세기 말 미국 장로교는 선교지 분할 정책에 따라 북장로교 측은 조선 땅의 북쪽 지역, 남장로교는 남쪽 지역을 맡았다. 북장로교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파견해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를 세웠고, 남장로교는 유진 벨 선교사에게 호남 지역 선교를 맡겼다. 유진 벨 선교사는 목포의 정명학교, 영흥학교, 광주의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목포 프렌치 병원, 광주 기독병원을 세우는 산파 역할과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그 무렵에 멀리 애틀랜타에서 한 청년이 한국 선교사로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을 했는데 그분이 바로 저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입니다.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할아버지는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22세 때인 1912년 한국에 들어와 주로 전주, 익산, 군산 등지에서 선교 및 교육 사역을 펼쳤습니다. 1922년은 중요한 해입니다. 바로 유진 벨 선교사를 만나러 한국에 들어온 그의 딸 샬럿 벨이 유진 벨과 일하던 청년 윌리엄 린튼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한국 땅에서 이루어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만남은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곧 결혼했고 할머니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할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정착하기로 하셨지요.”

그의 할아버지를 비롯한 초기 교회 선교사들은 근본적으로 한국을 강점한 일본에 비판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기독교계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양립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갈등의 씨앗이 있었는데, 바로 ‘신사참배 문제’였다. 신사참배를 수용하자니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었고, 거부하자니 학교가 문을 닫을 판이었다.
“당시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셨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도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눈물을 머금은 채 1937년 신흥학교를 자진 폐쇄시키셨어요. 결국 남장로회 선교부 산하 10개 학교가 호남지방에서 교육을 실시한 지 38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고, 선교사들은 추방 명령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도 1940년 11월에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선교사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일본 총독부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학부모들이었습니다. ‘그냥 신사참배를 하지 왜 학교를 폐쇄해 아이들의 미래를 망치느냐’고 항의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5년 후 한국은 감격적인 해방을 맞는다. 추방당했던 수많은 선교사들이 다시 한국으로 향했다.
“1946년 11월, 신흥학교가 복교되면서 할아버지는 교장직을 다시 맡아 독립된 한국을 위해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하셨어요. 이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요. 전주의 기전여학교를 둘러보시던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한 일이 화장실 이전 공사였어요. 일제 시대, 학교에 있던 신사터 자리에다가 공중 변소를 옮겨 놓으신 것이지요. 학교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화장실이 떡하니 자리 잡게 되었지요. 신사터에다 ‘똥통’을 얹어 놓음으로써 할아버지는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신사참배에 유쾌한 복수를 하셨어요. 이후 할아버지는 대전 지역에 기독교 대학을 세우는데 헌신하셔서 지금의 한남대학교를 설립하셨습니다.”
인요한 소장의 아버지 휴 린튼은 1926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휴 린튼 역시 현대 한국의 굴곡 많은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신사참배 문제로 온 가족이 미국으로 추방당했을 때 휴 린튼은 평양외국인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해군 장교로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어스킨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장교로 복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이후 1953년 한국에서 전역했다.
“전쟁 후 아버지는 어머니 로이스 린튼과 세 아들을 데리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부모님이 맡게 된 선교지는 순천이었지요. 그때가 1954년입니다. 아버지는 남해안 지역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600곳이 넘는 교회를 개척하셨어요. 항상 검정고무신을 애용하면서 섬지역을 순회하며 선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순천기독재활원과 요양소를 세우는 등 의료활동에 적극적이셨습니다. 형들이 폐결핵에 걸린 이후 결핵퇴치사업에 열심을 기울이셨고 북한에도 다녀오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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