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가 많은 것은 단 하나의 진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들이 기억하는 아버지 탁명환

고 탁명환 소장: 1964년 한국의 신흥종교와 기독교이단운동의 연구를 시작한 이래 수많은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반사회적이고 범죄적인 사이비종교를 조사하고 연구했다. 왕성한 저술활동을 통해 <기독교이단연구> 등 26권의 신흥종교운동 및 기독교이단관련 서적들과 수많은 논문들을 출간했으며, 이 저술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기독교이단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아들들이 기억하는 아버지 탁명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탁지원 소장: 따뜻한 남편이자 온화한 아버지셨습니다. 때로는 몇 달, 며칠을 집에 못 들어오실 때에도 꼭 손 편지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오실 때는 꼭 그 지역의 특산물을 사오셨습니다. 예를 들면 호두과자를 사오시면 저희는 ‘아버지가 천안에 다녀오셨구나.’ 간고등어를 사오시면 ‘아, 안동 다녀오셨구나’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것을 배워 지방에 가면 아무리 바빠도 꼭 특산물을 사가지고 옵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지만 함께 하려고 노력하시던 모습이 많이 기억납니다.

탁지일 교수: 1985년 집 밖에서 펑하는 소리가 나서 뛰어나갔는데 선친을 겨냥한 자동차 테러였습니다. 수백 개의 파편이 선친의 온몸과 얼굴에 가득 박혔고 배웅 나간 어머니도 다리에 중상을 입으신 큰 사건이었습니다. 선친은 그 와중에도 저를 보자마자 “지일아, 사진기 가져와서 찍어라”고 하셨습니다. 프로의식이 투철하신 분이었습니다.

탁지원 소장: 119구급차가 오기 전까지 선친께서는 사역을 위해 눈만은 지켜달라고 기도하셨답니다. 그 기도의 응답대로 단 하나의 파편도 눈동자에 박히지 않아 실명을 면하셨는데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난시가 고쳐졌습니다. 그래서 집회 때 간증할 일이 있으시면 “난시로 고생하시는 분이 있다면 폭탄 한 번 맞아보시라”는 이런 농담까지 할 여유가 있으셨고, 항상 유머러스하셨습니다.


어떻게 이 사역을 이어받게 되셨습니까?
탁지일 교수: 저희는 소명이라는 말을 쓰기가 쑥스럽습니다. 선친을 사랑했고 그분이 못 다하신 일이 있습니다. 교계 어르신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했는데 누가 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어서 그렇다면 아들들이 해야 하는구나 싶어 이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희에겐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냥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지요. 가야 하는 길이기에 억지로가 아닌 즐겁게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올해 초 선친의 25주기를 준비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제 나이가 선친이 돌아가신 나이가 되어 있더군요. 어머니와 아내를 보는데 ‘그때 어머니가 참 젊으셨구나…’ 마음이 애잔했습니다.

탁지원 소장: ‘(아버지를) 숱한 죽을 고비에서도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왜 이때는 데려가셨나?’ 제 안에 드는 원망과 의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셨다는 것과 남은 사람들이 그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당시 형님은 미국 유학 중이었고, 동생은 군 복무 중이라 제가 먼저 선친의 사역을 이어받아 시작하고 형님과 동생이 돌아와 삼형제가 함께 이단대책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후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잡혔습니다. 당시 저는 어머니께 저들을 용서할 수 없고 똑같이 복수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손양원 목사님을 빗댈 것은 아니지만 저 사람들을 이기는 방법은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용서했고 나중에 꼭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처음 그 사람은 사형언도를 받았는데 저희가 두 번의 탄원서를 제출해 15년형으로 감형 받고 만기 출소했습니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데 언젠가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꼭 밝혀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이 사역을 하시면서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시겠어요?
탁지일 교수: 얼마 전 50주년을 맞은 퀸즈한인교회에 초청돼 다녀왔습니다. 그때 그 교회 원로 사모님께서 오셔서 제가 서 있던 강단에서 선친도 강의를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탁지원 소장:몇 년 전 강의를 마치고 나왔는데 한 권사님이 선친의 눈을 이식 받은 자매가 와서 제 강의를 듣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온몸에 전율이 일더군요. 아버지의 눈으로 아들이 강의하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웠는데 그 상황만으로도 격려가 되었습니다. 이런 간증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5년이 지났는데도 옛날에 선친께 받았던 은혜, 도움, 섬김을 기억하고 정말 많은 분들이 이야기해주십니다. 한 번은 선친이 장애인교회에 초청받아 가셨는데 그 교회 형편이 어려워 보여 타고 가신 승합차를 놓고 오시기도 했습니다. 선친이 마지막으로 섬기시던 교회가 청각장애인들이 다니던 교회였습니다. 세상 교회는 말이 많은데 이 교회는 말이 없어 좋다며 웃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는 아직도 그 교회와 교제하고 있습니다.

탁지일 교수: 요즘도 선친의 명예를 훼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밖 이단이든지, 교회 안 이단옹호자들(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이단들을 돕고 대신 ‘현대종교’를 공격하는 자들)입니다. 돌아가신 지 25년이나 된 지금도 선친을 잘못된 이야기로 음해하면서 자꾸 선친을 현재로 소환합니다. 누군가에게 남편이고 아버지였던 분입니다. 저희에게는 여전히 아픔이고 고통인데 그것을 건드리는 것은 옳지 않지요. 역으로 25년이나 흐른 지금도 이런다는 것은 교회 안팎에 이단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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