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 나가는 크리스천, 이대로 괜찮은가?

진정한 가나안을 향해

성경은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시대 그리고 이른바 성령시대라 말하는 마지막 때의 현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성전의 개념은 교회와 같이 눈에 보이고 안 보이느냐에 관계없이 모든 것에 적용된다.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 안에 이상한 신조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가나안 교인(성도)’라는 단어다. 이른바 명목상의 이름뿐인 교인들로서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교회 출석은 하지 않는 그야말로 ‘안나가’ 신자를 일컫는 말이다. 천주교에서는 이들을 ‘냉담자’ 또는 ‘쉬는 교우’라 표현하고 있고, 개신교에서는 그동안 ‘잃은 양’이라는 아주 온건한 용어로 묵계 속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가나안’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면서 교회 안팎으로 좀 예민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나안 증후군’은 우리 한국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침체현상과 더불어 나타난 이 풍속도는 이미 기독교 선진국에서부터 오래 전에 시작된 현상이다. ㈜지앤컴리서치(지용근 대표)가 2017년 미국 퓨리서치의 조사통계를 빌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유럽의 경우 전체 크리스천 중 가나안교인 비율이 무려 69%, 미국은 36%로 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두 지역 모두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였다는 것으로 보아, 제3세계의 특별한 부흥의 열기를 예외로 한다면 이는 지역적이기 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이 시대가 나타내고 있는 종교 현상의 풍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른바 이러한 가나안 현상을 한국교회탐구센터 송인규 소장이 정의한 바와 같이 교회의 세속화, 교회염증, 개인주의라는 세 가지 시대적 현상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내면에 깔려 있는 것의 표출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가나안 교인’이라는 명칭부터 문제가 된다. 가나안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요 약속의 땅이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궁극적 소망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소망의 긍정적 단어를 한 칼에 무 베듯이 부정적 언어로 바꿔놓은 것이다. 천주교에서의 ‘냉담자’는 있는 현실 그대로를 누구나 아는 우리의 보통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의 ‘가나안 교인’은 말장난으로 말을 반어적으로 비틀어서 왜곡하도록 하였다. 이 단어는 비아냥거림의 표현이 그대로 나타난다. 더욱이 ‘천국’ 이라는 단어와 같이 우리가 숨은 보화처럼 아끼고 싶은 단어를 비아냥거림의 단어로 전락시키고 그런 다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킬킬거리고 있는 모습에서 이미 경건함과 진지함이 떠났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교회 안 나가는 버린 자식처럼 한쪽으로 무시하고, 교회 밖에서는 “그래, 나는 교회 안 나가는 가나안 교인이야. 그래서 어쩔 건데?” 하는 식으로 자신만의 방어벽을 치며, 자신의 신앙생활 형태도 또 하나의 교회임을 인정해달라는 자기합리화의 빌미를 제공하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궤변
교회 안에서 자신들을 향해 뭐라고 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가나안 교인’ 한 사람이 약간 히죽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목사님, 저 ‘가나안 교인’인 것 아시죠? 교회는 안 나가지만 예수님을 떠난 적은 없으니 저 역시 작은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인(christian)이니까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제는 교회 안 나가는 겁니까? 아니면 부득불 사정의 형편상 못 나가고 있는 상태입니까?”
그는 갑작스런 역공의 질문에 당황하다가
“그게 그거 아닌가요?”라고 말을 어물거렸다.
“아니죠. 모양새는 비슷해 보여도 내용은 정 다르지요. 교회 ‘못 나가’는 사람들은 교회 나가고 싶지만 현재 부득이한 사정으로 나갈 수 없기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그리고 자신이 한 지체로 속해 있던 교회공동체에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보며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항상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사람들이기에 주의 은혜가 임하여 문을 열어주시는 때를 얻으면 언제든지 나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이들의 중심을 알기에 이들을 향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 나가’는 사람들은 동기부터가 자신의 의지적인 선택의 결과이기에 주위에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길 뿐입니다. 이 차이가 엄청난 것입니다. 물론 신앙은 자기의 결단과 선택의 자유의지가 작용되지만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기에 우리에게 이렇다 할 신앙적 선택의 길은 없습니다. 이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 갈 것은 과연 교회 안 나가며 ‘가나안 교인’으로 머무는 것이 성경적인 기준에서 어떠한가를 살펴볼 일입니다.”

성경은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시대 그리고 이른바 성령시대라 말하는 마지막 때의 현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성전의 개념은 교회와 같이 눈에 보이고 안 보이느냐에 관계없이 모든 것에 적용된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함은 신학적인 의미가 있으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덮고 있다.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의 사랑을 원하시지만 거짓 위선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드리는 희생제물이라면 눈에 보이는 제단의 제물도 원하신다. 교회 안의 큰 아들도 중요하고 밖에 나가 있는 작은 아들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하신다. 큰 아들의 판단과 정죄는 문제이다.
그러나 작은 아들의 집 떠남은 사실 더 큰 문제였다. 그가 회개하고 집의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영원히 불효 탕자로 남았을 것이다. 끝내 자기의 생각에 붙잡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라면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기다림도 때가 있다. 언젠가는 아버지도 늙고 병들어 죽을 때가 오기에 그 전에 아들이 돌아와야 한다. 아버지가 죽고 아버지 집의 문이 닫혀버리면 그때는 늦는 것이다. ‘안나가’라는 말은 ‘나가’야 함에도 반어적으로 상대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나가’는 교인들은 나가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잠시 일탈하고 있을 뿐으로 해석된다. 다만 시간의 제한성이 있으므로 속히 나가야 한다. 속히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가나안 교인들의 공통적인 변이 있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것이다. 교회는 싫기에 안 나가지만, 예수는 좋기에 마음에 품고 산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변론은 궤변에 속한다. 마음과 몸이 분리되고 이에 따라 신앙과 생활이 분리될 때가 많다. 머리와 몸이 분리된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예수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머리인 예수만 품고 몸인 교회는 버린다면 이는 ‘예수 유령’과 사는 꼴이다. 몸이 없이 머리만 허공에 떠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의 육화(肉化)를 이룬 성육신(incarnation)의 삶의 실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몸의 코이노니아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늘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 안에 모여 있지만 머리되신 예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각기 자기 생각대로 자신이 머리가 되어 움직이려 하기에 그곳에 머리되신 예수는 없고 탐욕적인 육의 생각으로 가득하여 시기 질투와 분냄과 분쟁으로 인한 싸움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상처주고 어지럽게 한다. 사실 이러한 이유들로 가나안 교인들이 생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몸과 머리가 분리될 수 없듯,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가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다. 그러나 이곳은 전쟁의 땅이기도 하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우선 견고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은 결코 안일한 안식처의 땅이 아니었다. 광야가 힘들어 속히 광야를 벗어나기 원했지만, 자기 내면의 싸움을 해야 하는 광야와는 달리 가나안은 먹을 것이 풍부한 땅이지만 이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하는 땅이었다. 특히 무력으로 정복했다 하더라도 그 안에 남아 있는 우상숭배의 여인들 유혹은 더 큰 영적 전쟁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렇게도 소원하던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우상에게 빠져드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이는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진정한 가나안의 실체를 묻게 하고 있다.

성경에서 광야는 교회를 말한다. 광야가 우리 영적 순례자의 행보에 마지막은 아니다. 그 목적지는 가나안이고 광야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의 영적 훈련을 쌓는 곳이다. 광야에서의 훈련을 통과하지 않으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남지 못 한다. 마찬가지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광야와 같은 교회에서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어려운 훈련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지체로서 코이노니아(교제)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가나안에 들어가 천국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사랑의 길’
우리는 지금 가나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 그리고 실제로 나보다 엄청 큰 상대인 가나안 이방 족속들을 이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지금은 광야에 머물면서 더욱 영육 간의 훈련을 연마하여 가나안 입성을 준비해야 한다. 설령 눈에 보이는 가나안에 들어와 있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가나안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계속 광야에 머물면서 하나님 음성 듣는 훈련을 연마해야 한다.

오늘 진정한 가나안을 향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무엇일까? 다른 그 무엇보다도 ‘사랑의 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 모든 사랑의 속성을 결말짓는 ‘인내’로서 표현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인내이다. 이는 특히 오늘을 살아가는 천국 시민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천국시민으로서 그 특권을 누리기 위해 철저히 배양해야 할 것이 인내, 기다림이다. 가나안 천성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림으로 인내해야 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처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이 오시기를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붙들어야 한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을 때, 예수님도 교회(보이는 성전이든, 보이지 않게 따르던 믿음의 무리이든)가 싫으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교회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상처 주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그토록 상처 주고 실망시킨 교회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교회를 떠나지 마라. 네게 상처 준 그 교회 안에서 함께 울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교회가 주는 신선함과 유익함 그리고 새로움이 없는가? 예수님 때도 그랬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빈정거렸다. 지금도 똑같다. 예배형식을 새롭게 도입하고 교회 프로그램을 새롭게 개발해도 해 아래 새 것이 없듯 모든 것은 곧 지나가고 잊혀져 버리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가 아무리 실망스럽더라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나가 교인’들은 교회의 본질인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 안에 머물고 있으며, 하나님 중심-말씀 중심-교회 중심의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의 룰 속에서 처절한 자기와의 영적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 들이다. 그러므로 물러나면 안 된다. 나가 있는가? 안 나가든, 못 나가든 어서 속히 교회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나부터 교회를 새롭게 하도록 힘써 기도할 일이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교회는 또 한 번 새로운 도약의 부흥기를 맞을 것이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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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남 (목사)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기독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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