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나눌 때, 찾아오는 평안

양털처럼 가벼운 나의 멍에

어머니의 유품을 버리면서 맹세했다. ‘앞으로 꼭 꼭 꼭(세 번 고민) 필요한 물건만 사자!’ ‘내 앞으로 떨어진(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이라면 산뜻하게 하자!’ ‘아무리 싼 물건이라도, 90% 세일을 하는 옷일지라도 사지 말자. 내 옷장 서랍에 어떤 옷이 있나를 생각하고 접어두자!’

하나님 나라를 꿈꾸지만 세상에 발목 잡혀 살고 있는 우리는 하루하루 무언가를 챙기고 모으면서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이 감정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내 꺼’라고 품고 자랑하면서 말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은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모습에 대하여 온몸과 마음으로 고민해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나 편한 대로, 내 입장대로 해석하고 정리하며 긴 세월을 보냈는데 그 허송세월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10여 년 전 일흔두 살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평소 건강하셔서 전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장례를 치르는 3일 내내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더 힘든 일은 남겨진 어머니의 흔적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의 문제였다. 홀로 남겨진 아버지, 이래저래 얽힌 여러 가지 문제들. 눈앞에 보이는 많은 유품들…
수백 장이 넘는 어머니의 사진을 정리하면서 갈래머리의 어머니를 만났고, 발그레한 볼의 새 각시인 어머니도 볼 수 있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수십 년 전 사드린, 기억이 가물가물한 코트부터 방안을 가득 채웠고, 어머니의 한평생을 만나는 먹먹한 날들이 이어졌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얽혀 삶을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 모든 것의 허망함과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다.
약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어머니의 흔적을 정리했다. 참 많이 버렸다. 물건도, 감정도 그리고 물질도, 사람까지도……. 그 1년이라는 시간은 내 삶에서 가장 길고 버거운 시간이었지만, 하늘나라 사람이 되어가는 귀한 훈련의 시간이었다.
어머니의 유품을 버리면서 맹세했다.
‘앞으로 꼭 꼭 꼭(세 번 고민) 필요한 물건만 사자!’ ‘내 앞으로 떨어진(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이라면 산뜻하게 하자!’ ‘아무리 싼 물건이라도, 90% 세일을 하는 옷일지라도 사지 말자. 내 옷장 서랍에 어떤 옷이 있나를 생각하고 접어두자!’ 은근히 책 욕심이 많아서 읽은 책들은 잘난 척하고 진열하는 부끄러움이 많았는데, 중고서점에 팔거나,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거나 하여 책장 두 개를 정리하였다. 거실이 참 가벼워졌다.

얼음벽 같았던 감정의 정리
눈에 보이는 물건의 정리는 쉬운데 보이지 않는 감정의 정리는 얼음벽이었다. 아버지는 6개월 만에 쓰러지셨다. 나는 자식들과 의사소통이 안 되었던 고집스런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반신마비 환자로 누워버린 아버지를 보살피는 일을 누군가가 해야 했고, 내 몫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누군가에게 불평한다고 원망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감정의 찌꺼기들을 하나하나 자르기 시작했고 버리기 시작했다. 물론 완벽하게 버릴 수는 없었지만, 내 스스로를 볶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고, 간식을 준비하면서 즐거움과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런저런 모양새로 아버지를 챙기고 섬기는 내 모습을 보면서 동생들의 마음결이 많이 편해졌고, 매 주일 아버지를 면회 가는 일은 가족 화합의 시간이었다. 요양병원과 요양센터 생활 8년 만에 아버지는 어머니 곁으로 가셨다.
평안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면서 고마웠노라고 말씀하신 아버지. 계모 슬하에서 고생 많으셨던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실 정도로 아버지의 마지막은 평안하셨다. 사는 내내 사랑이 늘 부족했던 아버지에게 사랑 가득, 관심 가득 쏟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 내겐 참으로 귀하고 감사했다.
좋아하는 찬양이 있다.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 아니니…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내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할 것처럼 끌고 가지만. 결단코 해결할 수 없다. 끝없는 분노와 불평만이 가득한 삶, 무한의 삶을 사는 것처럼, 자신 앞에는 결코 마지막이 없는 듯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우리의 삶…. 내가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맡기고, 나는 내게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집중하며 해 나갈 때 많은 선물이 우리에게 내려온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가야만 하는 길, 나의 멍에… 그때 자신의 멍에를 지고 오라시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보자(마 11:28~30).
돌보다 무거웠던 멍에가 양털처럼 가벼워진다.†

이미선 (약사·건강한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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