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노아의 때와 같다
헌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를 준비하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전도이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우리는 반드시 전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 영화롭게 되는 지점이다. 복음을 알고 전도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쾌락과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병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이들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될 것이다.
올해 1월 중순, 열흘간의 일본 단기선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공항에서 중국 우한 소식을 처음 들었다. 큰 탈 없이 지나가리라 생각했던 역병은 순식간에 전 세계를 강타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전 세계 사람들은 ‘평범했던’ 일상을 빼앗겼고, 경제를 지키기 위해 완화정책을 사용했던 나라들은 급히 봉쇄정책으로 변경했다.
이제는 우리 누구나 마스크를 끼고 손 소독제를 사용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일정한 거리 두기가 자연스러운 예의가 되었다. 그렇게 코로나19는 아직 진행 중이며,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새로운 일상’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일상’은 어떤 의미일까? 코로나19는 ‘신앙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나이를 불문하고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졌고, 각종 소모임은 폐지되거나 둔화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은 시기에 교회는 더욱이 사방에서 욱여쌈을 당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이런 시간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본질적인 능력과 사명을 되찾게 되리라 소망한다.
대표적으로 그동안 교회에게 “신천지”는 어려운 숙제와 같았다. 거짓과 속임으로 무장하고 달려드는 그들은 교회가 다루기 어려운 상대였다. 애써 나름 피하고 막아왔지만, 교회 속 영혼들은 술술 새나갔다. 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십 만명으로 덩치를 급속히 키우는 동안에도 교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그들을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했다. 잃을 것이 많아서인지 광야의 이리떼와 같은 그들 앞에 과도하게 몸을 사리고 조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그들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청년들을 보게 되었다. 교회가 놓친 청년들이 그곳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참으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동시에 교회에게 그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최근에는 이태원의 동성애 젊은이들이 주목을 받았다. 교회가 끌어안지 못했던 그들은 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은 우리 곁에 살고 있는 평범한 이들이었지만, 내면은 거라사 광인처럼 울부짖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섬기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이 마치 예수님을 몰아내는 거라사 마을의 주민들과 오버랩 되었다.
그렇게 그동안 교회가 덮어두고 모른척하고 지냈던 상처가 하나 둘 드러났다. 덮어둔 상처를 열어젖히면 쓰라리고 아프지만 치료의 시작이기도 하다. 교회는 회복되어 일어나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러 다시 광야로 가야 되지 않겠는가? 원수의 입을 벌려 잃어버린 양을 꺼내서 구해야 되지 않겠는가?
교회가 가야할 길
다시 일어날 교회를 생각할 때 다윗이 떠오른다. 다윗은 일생을 전쟁하며 살아온 예배자이다. 잘 아는 것처럼 그의 시편은 70%가 눈물로 부르짖는 탄원시이다. 왜 그는 그토록 두려워하며 울부짖었는가? 언제나 대책 없이 싸움터에 뛰어들었기에 필사적으로 부르짖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닐까? 거대한 골리앗과의 싸움에 뛰어든 이유는 단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모독하는 이유였다. 그에게 다른 계산은 없었다. 생각이 많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는 주님으로 인해 싸움에 뛰어들었고, 그 가운데 기도했다. 수많은 탄원시는 그의 전장 한가운데서 부르짖었던 그의 기도였다. 그는 그렇게 평생을 싸우고 승리하며 살아왔다.
사실 그에 반해 우리는 싸움을 잃어버렸다. 오랫동안 의로운 분노를 참고 싸움을 피해왔다. 그저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고자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소박하게 살겠다는 죄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싸우지 않고 겨우 생명만 유지하라고 그 이름의 권세를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의로운 분노로 싸워서 이겨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역병과 기근, 거짓선지자와 타락으로 시대가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말세에 부어지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역사에 유례없는 부흥을 일으킬 것이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마 25:1~3).
열 명의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갔지만, 다섯은 기름을 준비했고, 나머지 다섯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두가 처음에는 기름을 정성껏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랑이 오지 않았고, 그들이 준비한 기름은 상하여 폐기하게 되었다. 그중 다섯 명은 대가를 지불하고 기름을 다시 구매했지만, 나머지 다섯 명은 준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랑이 오지 않는다면 기름의 비용을 아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 늘어나다 보니, 오히려 매일 기름을 사서 준비하는 이들은 어리석은 자들이 되었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비용을 아끼는 이들은 슬기로운 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슬기로운 자들이 세상에서 어리석어 보이는 원리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 안에 분명하게 생각의 차이가 발생했는데, 기름을 준비한 여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랑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더해졌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여인들은 오히려 신랑이 오지 않은 밤을 다행으로 여기며, 하루하루를 다른 종류의 가치로 만족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코로나19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알리는 징조일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알 수 없다. 단지 바람이다. 오늘도 삶으로 대가를 지불하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이들은 지금의 상황을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는 종소리로 여기며 소망하게 된다.
기름을 준비했는가
당신은 삶을 헌신하여 기름을 준비했는가? 오늘 예수님께서 오셔도 괜찮은가? 말세의 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대가를 지불하고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현 시대에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기름은 무엇일까?
나는 대가를 치러서라도 시대를 앞서가는 “온라인 환경”을 준비하고 싶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많은 영혼이 온라인에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인구가 언제 어디서나 온라인에 접속해서 방송을 들여다보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송출하는 시대이다. 또한 하루가 다르게 세상의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다. 거기에 비하면 교회는 뒤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는 단지 성전의 강대상을 영상으로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온라인 예배가 아니라 오프라인 예배를 온라인에 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온라인 포맷과 오프라인 포맷은 모든 것이 달라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예배 초기에 각 교회들은 온라인 예배의 태도, 복장, 헌금 등을 공지하며 강조했다. 그와 같은 노력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는 관성으로 온라인 예배에 성도들을 묶어두는 것은 조만간 한계를 보일 것이다. 관점을 완전히 바꿔서 온라인 예배만의 포맷과 강점을 계발해야 한다. 온라인을 통해서 전할 수 있는 복음의 은혜가 탁월하게 전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온라인상에 있는 이들을 전도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교회가 대가를 지불하고서 “온라인 환경”을 취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단순하다. 그곳에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교회는 반드시 온라인 환경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반드시 오프라인 모임을 강화해야 한다. 온라인 모임도 중요하지만, 오프라인 모임은 더 중요하다. 혹시라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교회는 오프라인 모임을 붙잡아야 한다. 온라인 플랫폼의 주도권은 우리가 가질 수 없다. 플랫폼의 주도권을 가진 이들이 온라인 예배를 금지할 경우 어찌할 것인가? 동시에 코로나 이상의 재난으로 인해 교회 건물에 모이는 것도 불가능할 경우 어찌할 것인가? 가정예배를 이끌 수 있는 리더가 부재하고 개인 예배의 역량이 훈련되지 않았다면 수많은 어린양들은 홀로 고립될 것이다. 교회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끝까지 오프라인 모임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소그룹이어야 한다. 다양성과 소통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일방적인 대그룹 집회는 매력이 없다. 더군다나 교회 성도들이 위기 가운데 얼마나 모래알처럼 무너지고 흩어지는지 이번 기회를 통해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고 지탱하는 구조인 소그룹 네트워크가 무너졌기에, 교회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갔다. 교회가 개인주의화 되는 동안 거대한 군중의 익명성 안에서 숨겨졌던 개인의 죄는 독버섯처럼 늘어났다. 이번 기회에 한국교회는 대형 집회의 전통이 손실되는 대가를 치러서라도 소그룹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서로가 서로를 깊게 섬길 수 있는 오프라인 소그룹 모임이 절실하다. 이번 “거리두기” 안에서도 최소한의 단위인 가족은 운명공동체로 살아간다. 교회에도 이와 같이 운명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영적 가족 소그룹이 존재해야 한다. 서로의 아픔과 허물을 받아주고 보듬어주는 작은 공동체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특별히 마지막 시대에 소그룹 모임에 과감히 “교회”의 이름을 허락해주면 좋겠다. 그들이 건물에 모이지 않아도, 또한 주일에 모이지 않아도, 더 나아가 그 중에 목회자가 없다 해도 그들의 모임을 교회로 인정해주면 어떨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그 자체로 놀라운 능력을 가진다. 교회가 건물에 갇히지 않고 사회 곳곳의 수많은 영역에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교회의 지도자들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교회가 대가를 지불하고 신실하게 기름을 준비한다면 다시 오실 예수님을 향한 갈망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특별히 나는 이 본문에서 처녀들이 5대5의 비율로 구성된 것을 주목하고 싶다. 2대8이나 1대9가 아니라 5대5의 비율로 처녀들이 있었다. 이에 마지막 때에 50%의 비율로 신부가 준비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신부로 준비되지 못했다. 나는 이 말씀을 붙잡고 시대의 거대한 부흥을 꿈꾸고 싶다. 이제 코로나19를 놀라운 부흥의 시작이라고 기억하고 싶다.
세상에서 의지했던 가치들이 무너질 때 마음이 가난해진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추수의 낫을 기다리는 들판의 익은 곡식처럼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영혼의 황금물결이 파도치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전도이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우리는 반드시 전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 영화롭게 되는 지점이다. 복음을 알고 전도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쾌락과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병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이들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될 것이다. 전도는 전쟁을 수반한다. 한국교회는 본래 싸울 줄 아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보다는 동거로 방향이 틀어졌다. 이제 다시 우리는 싸워야 한다. 눈물로 씨를 뿌리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싸움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싸움에서 승리하는 중요한 열쇠는 거룩이다. 시편 17편에서 주님을 향한 탄원 뒤에 바로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승패가 자신의 능력이 아닌 거룩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싸우지 않는 이들은 ‘거룩’이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하지만 싸우기로 작정할 때 ‘거룩’은 생명의 원천이다. 원수에게 틈을 주지 않는 거룩한 삶이 승리를 불러온다.
더 이상 예전의 편안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하지 말자. 오히려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와 놀라운 기회가 교회 앞에 놓여 있다. 우리가 싸우기로 작정할 때 어둠은 물러갈 것이며, 우리와 함께 신랑을 만날 슬기로운 처녀로 예비된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코로나19는 새 부대를 준비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나팔소리이다. 헌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를 준비하자. 마지막 싸움을 싸울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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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목사)
월드미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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