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노아의 때와 같다

종말의 때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되고 있는가?

이 시대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노아 때와 같이 구원의 방주와 같다. 구원의 방주에 오르기 위해서는 노아와 같은 순종이 절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방주를 지었다 해도 순종의 마음이 없다면 방주 문이 닫히듯 결국 구원의 문도 닫히고 말 것이다. 불순종의 시대에 살 수 있는 길은 순종으로 돌아서는 길이다.

2007년 상영된 영화, 「에반 올마이티(Evan Almighty)」는 현대판 노아방주의 이야기이다. 2003년 상영된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의 후속작이면서 상이한 입장에서 신과의 관계를 언급한다. 브루스는 인생이 꼬이고 모든 것이 엉망으로 신을 원망하고 있을 때 신으로부터 권능을 직접 위임받아 전능자(Almighty) 역할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에반은 정 반대의 경우에 신을 만난다. 브루스와는 달리 TV앵커에서 하원의원까지 당선되어 새 집에서 가족들과 더불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받으며 행복의 절정을 누리려 할 때에 신의 부르심을 받는다. 에반에겐 가장 잘 나가고 있는 지금 이대로가 자기 인생의 황금기라 딱 좋은데 신이 찾아와 황당무계한 일을 제안하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 때처럼 큰 방주를 지어 생명들을 살리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에반의 인생은 지금까지 잘 나가던 때와 달리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의 격랑에 휩싸이게 된다. 말도 되지 않는 신의 제안을 뿌리치며 신으로부터 도망쳐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신의 집요한 추적이 따라와 자신도 통제불능이 될 만큼 그는 신의 강권적 요구의 이끌림에 끌려 다니게 된다.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그리고 원하지도 않는 삶이 그 앞에 펼쳐진다. 그러한 가운데 그는 신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회적인 모든 관계에서 ‘사회적 격리’가 일어남은 물론 가족들마저 그의 광기어린 환상을 피해 그의 곁을 떠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또한 가정적으로도 원하지 않는 ‘자가 격리’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부터 에반은 성경 인물인 노아와 같이, 노아가 겪었던 일들을 똑같이 그대로 재현하게 된다.

물론 이 영화의 끝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픽션이기에 설정상 그렇게 했겠지만, 현대판 노아방주를 그대로 재현한 이 영화는 노아 홍수와 그 방주가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역사적 고증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들이 현대에서도 사건화 하여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암시를 주었다. 그것은 홍수 난리가 노아 때처럼 하늘로부터 비가 많이 내려서만이 아니라, 마을 산중턱에 있는 저수지의 댐이 부실공사로 인해 무너지면서 마을을 덮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간접적 경고이기도 했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19의 역병이 창궐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 오늘 우리 눈앞에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노아 때에는 물의 홍수로 세상을 쓸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초미세균이, 인간이 안전하게 지키고 있다고 자랑하는 보건위생 방역망을 비웃듯이 인간의 생활 속에 잠식하여 범람하고 있다. 중세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흑사병)나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에서 창궐하여 세계적으로 무려 5천여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간 스페인독감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희생자 또한 만만치 않다. 현재 코로나바이러스의 움직임대로라면 쉬 물러가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적인 확산으로 세계를 두려움에 싸이게 할 것으로 보인다.

불신앙과 불순종의 시대
노아 홍수 때에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도록 극에 달했다. 저들에겐 기본적인 두 가지 죄가 있었다. 불신앙과 불순종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도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쾌청한 날씨에 홍수를 대비하여 산꼭대기에 배를 짓는 노아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가족 이외에 그 어느 한 사람도 방주에 오르지 않았고, 정작 홍수가 닥쳤을 때는 이미 방주 문이 닫혀 구원받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그 죄인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에반 올마이티」에서 다른 점은, 하나님은 에반 가족만 구원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여 버린 것이 아니라, 에반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에반의 방주를 통해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아의 때와 지금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에덴 이후 어차피 인간은 모두 죄인들이다. 노아의 때나 지금이나 종말론적 위기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환경 변화 이외에 인간의 속성인 죄성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다만 죄의 양상만이 다를 뿐이며, 지금은 노아 때와 달리 인간의 죄악이 더욱 다양해지고 극악해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을 현혹시켜 범죄케 하는 요소들도 많아졌다. 이러한 시대 변화 속에서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방주의 역할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대는 극도의 공포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정체성의 모호함으로 두려움에 싸여 방황하는 시대이다. 핵전쟁이나 암 등의 돌발적인 질환에 대한 공포심과 지금처럼 바이러스를 창궐케 하는 주요인으로서의 생태붕괴 그리고 AI 등의 과학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기술적 파괴와 같은 피해의식이 현대를 사는 현대인의 잠재의식에 깊이 침잠돼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dystopia)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케 하는 것이다. 여기에 현세와 내세를 연결하여 제시하는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고, 교회는 무엇으로 절망감에 무너져 내리는 인간 영혼들의 참된 위로와 소망이 될 수 있는가.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는 최근 그의 저서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에서 현대에 있어 ‘종교’에 대한 부분을 별도로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스러운 경전이 중세에는 적실했을지 몰라도, 지금 같은 인공지능, 생명공학, 지구온난화, 사이버 전쟁의 시대에 어떻게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코웃음을 치거나 우려를 나타낼 것이다. 과학의 승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종교에 대한 우리의 개념마저 변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종교를 농사나 의료와는 관련짓지 않는다. 애당초 종교가 농사나 의료와 무슨 상관이 있었나? 솔직히 말해 전통 종교가 그토록 많은 영역을 뺏긴 것은 애당초 농사나 의료에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제와 구루의 진짜 특기는 비가 오게 하거나, 병을 치료하거나, 예언하거나 마술을 부리는 것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의 특기는 언제나 해석이었다. 사제는 기우제 춤을 추거나 가뭄을 끝내는 법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우제 춤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나, 신이 우리의 기도를 못 알아듣는 것처럼 보일 때도 왜 신을 믿어야 하는지 정당화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큰 질문에 답하는 데 종교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21세기의 종교는 비를 내리게도 못하고, 병 치료도 못하고, 폭탄도 못 만들지만, ‘우리’가 누구이며 ‘그들’은 누구인지, 누구를 치료해야 하고 누구에게 폭탄을 투척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전통 종교는 기술과 정책 문제와는 대체로 상관이 없다. 반면에 정체성 문제와는 상관이 아주 많다.”
그렇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우리와 동행하셔서 그 길을 인도하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의 눈에 비쳐지는 우리의 하나님은 비도 내리지 못하시고, 병도 치료하지 못하시며 폭탄도 못 만드는 무능한 하나님 또는 인색한 하나님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렇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 위를 바라본다면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에 갈 길을 알려주시고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알려주신다.

노아의 때에는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너무도 분명하게 계시되고 입증되었다. 그리고 종말의 임박함도 알려졌건만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하였다. 그렇다면 이 패역하고 음란한 악한 세대를 물로 모두 쓸어버리겠다는 하나님 심판의 메시지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당연한 귀결점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하나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는 오늘 우리 세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분의 무지개 약속대로 더 이상 물로 심판받지 않고 대신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만.
종교를 가지고 있건 없건,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과학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과학주의 신봉자이건 아니건 그리고 노아 때의 홍수 심판사건을 한낱 고대 설화에 그칠 뿐이라고 코웃음을 치건 말건 간에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인류 미래의 암울한 모습이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에서 인간은 비극적 최후를 맞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가상이 아닌 실제 사건이다. 인간은 우주적 종말이건 개인적 종말이건 모두 어느 한계 시점에 이르면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때
의료기술의 혁신으로 새로운 인공 장기를 만들어 노화된 것들과 계속적으로 교체하고 때로는 융합 공학의 발달로 적당히 기계와 조합하여 AI의 도움을 받아 복합 인간을 개조해나간다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반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호화유람선을 평생 공짜로 타고 먹고 마시며 즐기는 VIP평생(아니, 영생) 회원권이 있을지라도 절대 유람선 밖을 벗어나지 말고 그 안에서만 지내야 한다면 요양원에서 우두커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생기 잃은 노인들처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삶이 너무 지겨워 그만 내리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다가 만일 일본에 정박해 있었던 유람선(Diamond Princess)처럼 코로나19 역병이 그 안을 휘몰아친다면 이는 그야말로 생지옥 같은 유령선을 타고 있는 셈이 될 것이니까. 그런데 창조주 신의 경지에 올라 평생 불사신이 되어 이 죄악에 물든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며 잘 살아보겠다고?… 오~ 제발 이런 망상은 버려야 한다.

이제 코로나19로 인해 변화된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이 일(코로나19 사건)이 하나님 손 안의 주권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세의 징조로서 깨닫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우선 하나님께서 세상의 악을 심판하시기 위한 역병의 창궐인 의미라면 노아 때와 같이 일순간에 쓸어버리는 홍수 심판이 아닌 것을 감사해야 한다. 자신은 죽게 된다면 천천히 죽음을 생각하고 임종을 준비하며 죽어갈 수 있는 암(癌)으로 죽기 원한다고 말하는 암병원의 어떤 암 진료의의 고백과도 같이 지금 우리는 우리 삶과 우리 몸 안에 침투해 들어온 죽음의 그림자를 보며 공포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돌아보아 깨닫고 겸손히 주의 십자가 앞에 나와 회개하며 거듭남의 구원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노아의 구원방주는 죽음의 순간에서 건져 살리는 역할도 있지만, 반면 갑작스런 홍수의 범람으로 회개할 기회도 없이 죽음 당함으로 억울하지 않도록 회개하여 노아처럼 순종의 사람이 되어 잘 죽을 수 있게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이다. 죄 중에서 찾는 웰빙(well-being)이 아니라, 죄로부터 벗어나 구원의 길에 오르는 웰다잉(well-dying)의 축복을 알려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성경은 노아의 이야기를 기록할 때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여호와께서(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 7:5)는 말씀과 같이 노아는 철저한 순종의 사람이었다. 만일 노아 역시 그 시대의 패역한 사람들과 같이 불신앙, 불순종의 사람이었다면 어떤 결과가 되었을까? 물으나 마나 그 역시 홍수로 인한 일순간의 죽음에 처해져 다른 사람의 구원은 물론 자신마저도 구원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아는 순종의 사람이고, 그 순종이 그를 살리고 그 후손을 이어가게 하셨다.
이 시대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노아 때와 같이 구원의 방주와 같다. 구원의 방주에 오르기 위해서는 노아와 같은 순종이 절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방주를 지었다 해도 순종의 마음이 없다면 방주 문이 닫히듯 결국 구원의 문도 닫히고 말 것이다.
불순종의 시대에 살 수 있는 길은 순종으로 돌아서는 길이다. 그러나 노아와는 다른 우리들에게 순종은 심히 어렵다. 그렇다면 순종하겠다는 내 의지의 노력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포기 상태에 이르는 항복이 그 방법일 수 있다. 에반처럼 하나님의 강권적인 이끌림에 의해, 나의 힘이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으므로.†

조규남 (목사)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기독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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