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진정한 예배자입니까

예배? 들통이 나야 형통이 흐릅니다

예배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예배가 그립고, 그분과의 친밀한 소통이 있는 예배가 소중했었음을 의미한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했던 주인 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예배로 증명해야 합니다. 미련하고 불편하고 손해 보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즐거이 걷는 순결한 성도들의 삶의 예배가 회중 예배로 흘러가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국가 정책에 따라 한 달 이상 예배당에서의 주중, 주일 예배모임이 중단되다 보니 SNS에는 어느새 온갖 다양한 예배 영상들로 가득합니다. 동시에 예배에 대한 논란도 뜨거워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회중 예배 모임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다른 한 쪽은 감염이 우려되는 상황이니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국가 정책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두 주장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예배에 관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제가 지난번 대구로 내려가니 교역자들이 코로나 사태의 역설을 알려주었습니다. 청소년 아이들이 “당연했던 예배가 이토록 소중한 예배인 줄 몰랐다”, “함께 모여 예배하던 회중 예배가 너무 그립다”라는 고백들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고백들은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 거의 모든 신앙인들이 공감하고 인정하는 글들을 보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늘 그러하듯 “당연한 줄 알았는데 은혜였으며 빼앗기고 나니 소중함을 알았다”라는 의미이겠지요. 그런데 짚어보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고백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해 솔직하자
“이토록 소중했던 예배”, “함께 예배함이 그립다”라는 문맥의 의미가 여러 악기가 어울린 예배팀의 인도함에 따라 함께 노래하고, 찬양대의 준비된 성가를 듣고 감동하며, 엄숙한 예전을 통해 무거운 하나님을 느끼며 목사님의 말씀이 오감으로 전달되어지는 종교형식의 예배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인지, 보고 싶었던 성도들을 만나 반가운 인사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식사하고 티타임을 통해 교제하는 것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우리의 고백들에 대해 정직하게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예배 대상이신 하나님께 칭찬을 들었던 다윗의 삶은 그 자체로 예배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그늘처럼 자신을 죽이러 쫓아다니던 사울을 피해 동굴에서도, 광야에서도 예배했습니다. 예배당 없이도 그는 항상 주님을 찾았고 종교 예전 없이도 하나님과 친밀하게 소통하는 예배를 했습니다. 시편의 수많은 글들이 그 증거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배 회복을 간절히 원하는 우리의 일상은 어떠한지요? 그 예배 회복의 외침이 정형화된 예배모임의 회복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면 주어진 24시간,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이전보다 빈번해지고, 주님께 내어드린 시간이 이전보다 늘어남으로 증명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배는 삶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고 생각하여 우리 삶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일하심과 자신이 경험한 그분의 놀라운 능력과 성품을 회중 예배를 통해 구체적으로 찬양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시 92:4)라는 말씀처럼 제 3자의 고백으로 만들어진 노래 가사를 억지로 따라하는 앵무새 같은 찬양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주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자신이 직접 맛본 삶의 이야기로 노래하고 찬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회중 예배가 너무 그립습니다”라고 입술의 고백을 했다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는 말씀처럼 그 고백이 증명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들의 삶은 솔직하게 어떠한지요?
감정노동이란 직업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정해진 감정 표현을 연기하는 일을 말한답니다. 이런 일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고객을 응대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고객님, 사랑합니다”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 고백을 받았을 때 어찌 반응을 하시는지요? “아니, 당신 저를 아세요?”라든지 훈련된 연기로 받아들이고 다들 지나치실 겁니다.
예배 중,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고백은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일 겁니다. 그때 우리가 어찌 살았는지 낱낱이 다 아실뿐 아니라 마음과 양심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받아들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명으로 아들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사랑을 확실하게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개인기도 시간은 서먹하고 재미없고 할 말 없어 건너뛰고, 바쁘다는 핑계로 성경 한 장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도 드라마 한 편, 게임 한 판은 정신줄 놓고 즐기며 핸드폰은 하루라도 없으면 못 살면서 하나님과 교제 없이도 일주일을 거뜬히 견디는 우리라면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회중 예배 모임의 형식에 관한 논란에 앞서 우리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
두 번째는 “회중 예배 모임이 소중했다”, “회중 예배 모임이 그립다”라는 말의 의미가 “예배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요즘 해 뜨는 시간은 아침 6시, 저녁 해지는 시간은 저녁 7시라고 합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으며 스스럼없이 진리인 양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모순이고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태양은 뜨거나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성인 태양은 그대로 있고 행성인 지구가 자전을 하기 때문에 단지 우리 눈에 그리 보일 뿐입니다. 1543년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를 통해 지동설이 발표되었고 우주 정거장을 세우는 현시대에 모두가 아는 평범한 사실이고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가 뜨고 진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지구에 사는 인간인 우리가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주체를 판별할 때 저는 가끔 성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십니까?”라고 여쭈어 보면 참석하신 성도 모두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라고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시공간이 지극히 제한된 회중 예배 중의 입술의 고백은 예배의 주체가 하나님이지만 전반적인 우리 삶의 예배의 주체는 우리가 되어 버린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이것은 신본주의 예배가 아닌 인본주의 예배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갑자기 비가 오면 우산을 찾듯, 삶의 문제가 생기거나 절박한 상황에 놓이면 그제야 생각나고 찾게 되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인본주의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감동하는 설교, 내게 은혜 되는 찬양, 내 기도가 응답받는 예배, 내 취향에 맞는 예배, 내가 회복하는 나 중심의 예배에 초점이 맞춰져 한결같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임에도 “어느 주일은 은혜를 누렸는데 또 다른 주일은 죽 쑤는 주일이었다”라고 들쑥날쑥한 예배를 했다면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버린 예배가 아니었을까요? 너무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과 제물을 드렸던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인 되어 버린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한국 교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교회의 청년국을 담당하시는 목사님과 교제를 했습니다. 뜨거운 열정을 소유한 청년들이 주중에도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라고 저는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대화주제는 현재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는 청년부 예배에 대한 현상들이었는데 목사님이 그럽니다. 회중 예배 모임이 영상으로 전환되면서 첫째, 둘째 주는 다들 너무 보고 싶고 예배가 그립다며 빨리 이 코로나 사태가 끝나기를 갈망하며 서로를 돌아봤는데 놀랍게도 한 달 후, 아주 빠르게 갈망이 옅어지고 열정이 식어감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굳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라는 상상치도 못한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주님을 향해 품었던 그들의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 부랴부랴 대책을 논의했고 곧 행동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서울에 금요 심야 집회로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코로나 사태로 그 집회에 유튜브 생방송으로 많은 분들이 참여한답니다. 그런데 찬양 시간에는 참여 숫자가 많은데 말씀 순서로 넘어가면 참여 숫자가 확 줄어든다는 아이러니한 사실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걱정하는 부분 중 하나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장년들도 이번 경험으로 인해 유명한 설교자의 말씀을 선택해서 듣게 되면 상대적으로 자신이 섬기는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현상이 생길 것이란 전망도 내어 놓았습니다.

자신에게 꼭 맞는 맞춤형 설교와 찬송이 아니면 은혜가 없다고 하는, 그래서 영상을 골라보게 되는 현실에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배의 본질에 오롯이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배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이 되어버리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게 되니 말입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
<영상 예배>와 <기성 회중예배>의 찬반론보다도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예배에 관한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개념 그리고 삶의 예배를 정직하게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시간이 주어지길 소망합니다.
예배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예배가 그립고, 그분과의 친밀한 소통이 있는 예배가 소중했었음을 의미한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했던 주인 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예배로 증명해야 합니다. 미련하고 불편하고 손해 보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즐거이 걷는 순결한 성도들의 삶의 예배가 회중 예배로 흘러가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중 예배는 다시 삶으로 노래하고 기도로 살아내는 예배의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코로나19 사태의 역설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또한 영상 예배가 일반 성도들에게 익숙해지고 있는 지금, 코로나 사태가 해결되어 회중 예배모임이 회복된다 하여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더 깊게 우리 삶에 뿌리를 내릴 것이라 예상해봅니다. 하지만 예배당에서 모이지 않는 주중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는 좋은 자극제가 되도록 영상에 담길 내용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주어진 숙제일 것입니다.

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살아갑니다. 역사에 개입하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앞서 나눈 글처럼 우리의 회중 예배, 가정 예배, 그리고 개인 예배가 회복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물과 불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12)의 약속이 이루어지겠지요.
우리의 삶과 회중 예배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랍니다(시 40:3).†

장종택 (목사)

목사·찬양사역자, ‘은혜로다’, ‘생명과 바꾼 주의 사랑을’의 작곡자,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자>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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