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약속의 땅(18회)

싱가 미싱을 수입해 큰 돈을 벌다


김명선이 누구인가. 세브란스병원 초대원장을 지내신 분이다. 그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순간의 선택이 한 사 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세브란스병원 원장을 지낸 김명선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훌륭한 의사의 모델’로 오르내리고 있다.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를 합쳐 연세대학교가 되게 만드는데 공로를 세운 분이기 도 하다.
한 번은 작은 아버지의 장녀에게 이상한 질병이 생겼다. 등이 굽고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척추결핵에 걸린 것이다. 한 번 등이 굽으면, 그것을 운명처럼 여기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젊은 여자 아이에게는 비극적인 삶이 아닐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 아이를 데리고 김명선 박사를 찾아갔다.
“이 아이가 내 손녀일세. 보다시피 등이 굽고 튀어나오고 있어 큰 걱정이네. 김 박사는 미국에서 현대의학을 배워왔으니 이 정도는 고칠 수 있겠지? 자네만 믿네. 손녀를 맡기고 갈 테니 반드시 깨끗하게 고쳐놓으시게나.”
김명선 박사는 사촌누이를 입원시켜 수술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는 정말 말끔하게 고쳐놓았다. 더 이상 키는 자라지 않았으나 수술 타이밍을 놓쳤으면 누님은 아마도 곱사등이로 눈물의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9대 독자이신 조부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절대 안 된다”고 하신 증조모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국 유학을 포기하시고 일본에서 재봉틀을 수입해 판매하셨고, 평양 미싱무역상 이사장을 맡아 미싱업계를 이끄셨다. 아버지도 열일곱 살 때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배로 일본을 오가면서 무역에 대한 것을 배웠다. 그 재봉틀이 바로 ‘싱가 미싱’이란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라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조부는 평양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죽음마저도 아름답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할아버지 이원근 장로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달려갔다. 온 가족이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맥박을 확인했다. 조금씩 맥박의 진동이 잦 아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어쩌면 저렇게도 얼굴이 환하고 깨끗하실까.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구나. 아, 예수를 잘 믿은 사람은 죽음마저도 저리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조부는 아주 평안하고 잔잔한 모습으로 찬양의 수레를 타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런데 염을 하는 과정에서 조부의 무릎이 울퉁불퉁한 두꺼운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무릎에 알통처럼 박힌 근육의 정체는 무엇일까. 할아버지는 낙타 무릎을 갖고 있었다. 오랜 세월, 딱딱한 마루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덕분에 무릎이 온통 딱딱한 근육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분은 새벽기도를 빠진 적이 없었다. 평생 기도의 단을 쌓으신 믿음의 용사였다. 원래 장로교인이었던 할아버지가 순복음교회로 옮긴 것도 새벽기도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가까운 서대문순복음 교회에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그때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과 비전에 큰 은혜를 받고 가족 모두를 이 교회에 등록시켰다.
“조용기 목사님은 아주 훌륭한 분이다. 말씀이 살아있고 성령으로 충만한 주의 종이자 우리 가족이 평생 섬길만한 교회를 찾았다. 이제부터 가족 모두가 가까운 순복음교회에 등록하고 이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자.”
그날부터 온 가족이 순복음의 열심신자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말씀에는 권위와 위엄이 있었다. 아무도 그 말씀에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나는 이원근 장로님을 존경합니다”


낙타는 무릎을 꿇어야만 주인을 섬길 수 있다. 낙타 무릎은 겸손의 상징이다. 교인들이 모두 낙타 무릎이 되면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국가가 산다. 그리스도인 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도록 낙타처럼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 조현주의 ‘낙타 무릎’이라는 CCM이 있다.
“뜨거운 태양 타는 갈증 /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모래 폭풍 / 내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짐 / 오늘도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네 / 내 사모하는 내 주인 위해 / 꿇어야 했던 나의 무릎은 / 어느새 단단해져버린 내 무릎은 / 느낌 없는 살이 되고 / 내 유일한 자랑 나는 낙타입니다 / 오직 기도와 간구로 살아가야 하는 나이지만 / 내 오만한 마음 교만한 내 입술이 / 님께 기도하지 못했지만 / 이제 나 기도할께요 / 내 무릎이 다 닳도록 아버지 그 이름 부를께요 / 하늘 문을 여셔서 응답 하소서 / 나의 힘과 능력 나 기도할께요 나 기도할께요 / 내 무릎이 다 닳도록 아버지 그 이름 부를께요 / 하늘 문을 여셔서 응답 하소서 / 나의 힘과 능력 난 기도할께요.”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조용기 목사님이 모두 집례해주셨다. 조 목사님은 입관, 발인, 하관예배까지 모두 인도해주셨다. 이원근 장로님은 원래 장로교인이었다. 평생 장로교회를 섬기시다가 늦게 순복음교회에 출석했지만, 다른 장로님들 못지않게 충성과 헌신의 본을 보이셨다. 그 충성에 대한 예우로 조용기 목사님이 모든 일정을 맡아주셨다.
“나도 이원근 장로님을 참 존경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장례식장에서 이원근 장로에 대한 존경의 뜻을 수차례 밝혔다. 그만큼 많은 사랑을 베풀고 하늘나라로 갔다.

북한을 위해 기도한다


나는 북한 선교에 관심이 많다. 왜냐하면 내가 존경하는 조부와 부모님이 모두 평양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의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를 향하여>라는 책이 있다. 죽기 전까지 5권을 집필했다. 북한 모든 주민의 필독서이자, 남한에서는 금서(禁書)다. 그 책 2권에 보면 김일성의 어린 시절에 대한 스토리가 나온다.
김일성은 어머니 강반석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출석했다. 성탄절이면 성극도 보고, 선물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데 늘 피곤하게 일하시던 어머니 강반석이 주일 설교시간이면 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때 김일성은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일본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계속 사랑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가르친다. 이런 기독교는 힘이 없다. 일본과 맞서 싸워 이길 힘을 길러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으로는 그런 힘을 가질 수 없다.’
결국 김일성은 교회를 떠났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우둔한 선택이었다. 복음의 진리는 표창처럼 예리하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두려움이 없다. 김일성은 왜 이 사실을 몰랐을까. 복음의 위력을 왜 몰랐을까.
김일성이 교회를 떠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6.25전쟁 때였다.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평양으로 후퇴했다. 그때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남쪽을 지지하는 일이 발생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할 수가 없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에 기초하기 때문에 기독교 진리와는 처음부터 평행선을 그을 뿐이다. 목사들의 태도를 보고 김일성은 기독교를 적으로 여겼다. 그리고 교회를 향해 엄청난 핍박을 가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였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김일성 일행 이 만찬을 하는 자리였다. 식사기도를 앞두고 김일성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동무들!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면 모두 ‘아멘’이라고 화답하시오.”
김일성을 신으로 섬기는 주체 사상을 김일성 대신 ‘하나님’으로 바꾸면 순식간에 북한이 복음의 땅으로 변화될 것을 믿는다. 그래서 북한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또한 그곳은 내 믿음의 선친들이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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