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진정한 축복은 예수를 잘 믿는 것이다(16회)

조부의 가방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믿음의 명문가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그것은 한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순간에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것이 전통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믿음의 명문가’를 형성하게 된다. 나는 우리 조상이 예수를 잘 믿은 것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의 축복임을 확신한다.

하루는 공산당 서기장 직함을 가진 강양옥 목사가 조부를 찾아왔다. “형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공산당에 협조하셔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님 성격이 워낙 대쪽 같고 철저한 보수신앙의 소유자셔서 절대 협조 안 하실 터이니, 조용히 월남하십시오. 제가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월남하여 어떠한 공직도 맡지 마십시오. 곧 통일이 될 텐데 통일이 되면 총살형입니다.”

이미 그때 조선공산당은 남한을 공산화한다는 적화야욕을 불사르고 있었다. 나의 조부 밑에서 미싱 무역상 행정, 회계업무를 전담하던 그가 김일성이 소련 공산당을 등에 업고 북한을 장악하자 일약 2인자로 부상한 것이다. 강양옥은 달필이었고, 탁월한 언변과 리더십, 조직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평생 김일성을 보좌했다. 후일 부주석의 자리까지 올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조선그리스도연맹 오경우 서기장의 말에 의하면 김일성이 생전에 매년 생일 때마다 찾아가서 예를 표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김일성 회고록 이외에 북한에서 일대기가 나온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조부는 강양옥의 말을 듣고, 1948년 6월 월남했다. 조부는 평양에서 미싱 협회 이사장을 하시며 미싱 무역상을 해서 큰돈을 버셨다. 소유하신 땅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다고 했다. 그 모든 재산을 고스란히 북한에 남겨놓고 월남했다. 가게와 땅과 집만 해도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 강양옥 목사의 경고를 받은 조부는 가족에게 다가온 환난을 피하기 위해 조용히 북한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셨다. 해주에 내려가셔서 고기잡이 통통배 하나를 빌려 놓으시고, 탈출할 디데이를 정하셨다.

조부는 전날 밤 온 가족을 모아놓고 탈출 계획을 상세히 설명하셨다.

“내일은 모두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한다. 각기 흩어져 기차나 버스 등을 타고 저녁 때까지 해주에 집결한다. 소지품은 평소 들고 다니던 가방 하나에 들어갈 최소의 것으로 한다.” 다음날 아침 온 가족은 비장한 각오로 집을 나서 두셋씩 짝을 지어 해주로 향했다. 그날 밤 해주에 집결한 가족은 조부가 빌려놓은 통통배 맨 밑바닥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선장은 그 위를 생선이 담긴 궤짝으로 덮어 위장하고, “절대로 아무 소리 내지 마시라요. 소리가 나서 들키면 우린 모두 물에 수장되어 죽습네다.” 겁을 주고는 바로 출발했다. 배는 밤새 통통 소리를 내며 38선을 넘었다. 숨죽이고 있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선장이 생선 궤짝들을 치우며 소리쳤다. “이제 안심하시오. 38선을 무사히 넘었습네다.” 온 가족은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때 조부는 달랑 가방 하나만 들고 내려오셨다. 그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돈? 집문서? 땅문서? 족보? 9대 독자인 조부는 집안의 내력과 조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 가방에 든 것은 ‘성경’과 ‘성경 주석서’였다. 조부는 시간만 나면 성경과 주석서를 함께 펼쳐놓고 말씀을 연구하셨고 매일 저녁 가정예배를 인도했다. 조부의 말씀에는 영적 권위가 있었다. 비록 신학은 공부하지 않았지만, 해주 고보에서 교편도 잡으셨던 터라 성경말씀을 알기 쉽게 풀어서 가족들에게 그대로 설명해주었다.

“성경에 참 밝으신 분이로구나. 나도 할아버지를 본받아야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의 마음이 솟구쳤다.

‘조화인생'과‘생화인생’



1949년 8월 광주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미 남장로교 소속 타요한(탈미지) 선교사가 조부를 비롯하여 북쪽에서 내려온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청했다. 제주도에 4.3사건으로 무너진 수많은 교회를 다시 건립하기 위해서였다. 조부는 타요한 선교사의 부탁을 주님께서 선교사를 통해 전해주신 음성으로 알고 기도로 준비하셨다.

1950년 1월 목포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내려가서 서귀포 옆 남원지역에 화전민의 땅을 사서 땅을 고르고 남원교회를 건축했다. 지금은 남원교회(예장통합)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조부는 조사(전도사)로서 2년 6개월간 남원교회를 목회하며 날마다 새벽종을 쳤다. 교회마당에 큰 종을 걸어놓고 새벽마다 4시 30분(예비 종)과 5시(시작을 알리는 종) 두 차례 종을 쳤는데, 성도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 교회로 향했다.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도 종소리에 전혀 불평을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자라나 살고 있는 마을의 한 원로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교회 종소리에 눈을 떴다. 종소리와 함께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고맙고 든든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그 종은 남원교회 마당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데, 교회를 방문한 길에 종을 쳐보니 그 종소리가 그렇게 맑고 청아하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교회 종지기 중 축복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교회를 100개 이상 세운 채의숭 국가조찬기도회장의 부모님도 종지기였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어렸을 때부터 교회 종을 쳤다. 나는 나의 조부가 교회 종지기인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우리는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를 진정으로 믿어야 한다. 믿는 척하면 안 된다. 껍데기 신자는 인생의 위기가 닥치면 곧 민낯이 드러난다.

커다란 항아리에 조화와 생화가 함께 꽂혀 있었다. 조화는 자신의 화려함을 한껏 뽐내면서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생화는 항아리에 수분이 줄어들면서 점점 시들어갔다. 조화는 생화를 향해 조소를 날렸다.

“너는 나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따라올 수 없어. 너의 그 거추장스러운 잔뿌리가 무슨 소용이 있니?”

그런데 어느 날 하늘이 잔뜩 흐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화는 비를 맞으며 후줄근한 모습으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생화는 잔뿌리로 수분을 흠뻑 빨아들여 싱싱한 모습을 회복했다. 청소부 아주머니가 구겨진 조화를 꾸깃꾸깃 접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며칠 후, 생화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 많은 사람들에게 은은한 향기를 전해주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불평한다. “왜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보다 더 잘 사는가. 이것은 참 불공평한 일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반드시 ‘조화인생’과 ‘생화인생’이 가려지는 날이 온다. 죽음이라는 인생의 빗줄기 앞에 조화처럼 구겨지는 영혼과, 생화처럼 활짝 꽃을 피우는 영혼이 확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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