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면 모두 무너진다(15회)

교회가 하나다


한국교회가 ‘하나 됨’의 본을 보인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한국에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전혀 없다. 다만 일부 자리에 집착한 사람들이 교권다툼의 틀에 묶여 서로 머리가 되려고 싸울 뿐이다. 근본적인 교리의 차이로 인한 분열은 없었다.

사실 유교적 가르침과 교회의 제자훈련은 비슷한 부분이 많다. 서당에서 글과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것과, 교회에서 성경 말씀과 제자의 삶을 가르치는 것은 유사한 점이 많다. 유동식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가 유교적 바탕의 부성적 성령운동에 힙입은 바가 크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순복음은 모성적 성령운동에 가깝다. 순복음은 감성에 호소하는 뜨거운 성령운동을 지향했다. 이 두 부류가 때로는 공존하고, 때로는 보완하면서 한국교회 신앙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외국은 어떤가. 교파는 지역 문화 언어를 배경으로 생겨난다. 독일은 루터교, 영국은 성공회, 스코틀랜드나 네덜란드는 장로교가 중심이다. 그런데 이 모든 교파에 속한 사람들이 이민을 가서 미합중국을 세웠다. 그 터전 위에서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선교사들이 교파의 특징을 안고 한국에 들어왔다. 처음 네비우스 선교사가 한국에 왔을 때는 선교사들끼리 지역을 나누어 협력하면서 일사불란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조선시대 500년 동안 당파싸움을 일삼은 나라가 아닌가. 그 잘못된 습성이 그대로 표출되어 교파가 끊임없이 분열했다. 그러나 아무리 분열해도 성경과 찬송은 하나였다. 그것만큼은 연합의 본을 보였다. 내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맡고 있는 것도 교회의 협력과 하나됨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나의 임무는 한기총, 한교연 연합까지라고 생각하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안팎으로 많은 저항과 도전이 계속되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교회는 하나 되어야 한다”고 모두 외치고 있지만 실제 하나 되자고 나서면 여러 가지 이유와 구실로 하나 됨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반드시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며 한국교회가 먼저 개혁되어져야만 한다.
무엇보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엡 4:3)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반드시 이루어야만 한다. 나라가 이리 혼란하고 방향을 잃어버린 좌초한 배와 같은 상황인데, 교회가 하나 되어 영적 지도력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만 한다.

선행을 베풀고 생색내지 말라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신앙의 기본을 모두 배웠다. 신앙생활의 정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이셨다. 어릴 때부터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씀이 있다.
“주의 종의 말씀에 순종해라. 반드시 성수 주일해야 한다.”
그것은 신앙의 기초였다. 그 기초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주일에는 만화조차 못 보게 하셨다. 일체의 매매의 행위도 못하게 하셨다. 주일에는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는 일도, 음식을 사 먹는 일도 일체 금하셨다. 이 같은 엄격한 신앙 교육의 영향으로 지금도 주일에는 외식도 꺼린다. 내가 처음으로 들은 유행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의 집에 갔다가 박재란 가수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살길래’라는 노래였다. 그만큼 유행가도, 세상 오락도, 술과 담배도 철저히 금하셨던 보수적이고 엄격한 분위기에서 신앙생활했다.

나는 어릴 적에 상도동에서 4년 동안 산 적이 있다. 그런데 1960년대 당시 상도동 뒷산에 토굴을 파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즈음 조부는 밤마다 여러 자루에 쌀을 담은 후 그것의 입구를 재봉틀로 봉했다. 이렇게 몇 개의 자루가 완성되면 그것을 메고 산에 올랐다. 가마니로 문을 만들어놓은 빈민들의 토굴 앞에 조용히 그것을 내려놓고 오셨다. 그 사람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쌀이었다. 그때 조부의 표정은 매우 엄숙했다.

“할아버지! 왜 그냥 조용히 놓고 오셨어요? 주인을 불러서 알려주어야지요.”
“성경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조그만 선행을 베풀고 생색을 내려면 차라리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낫다. 너도 선하고 착한 일을 하려거든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명심하거라.”
참으로 훌륭한 성품이었다.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조부를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조부의 선행은 상도동 일대 주민들에게 알려졌다. 토굴에 살던 분들이 쌀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조부는 토굴 주민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제가 갖다 놓은 것을 알고 왔습니까?”
“우리 동네에서 장로님 말고 우리에게 이렇게 쌀을 갖다 줄 분이 어디 있습니까?
매일 밤마다 산에 올라오셔서 토굴 입구에 몰래 쌀자루를 놓고 간 것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조부는 미소를 지으시면서, 토굴 주민이 가져온 빈 자루에 다시 쌀을 가득 담아주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시던 조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최고의 교육이었다. 이런 훌륭한 분이 나의 조부인 것을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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