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어머니로부터 순종하는 믿음을 배웠다(12회)

어머니로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은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주의 종의 말씀에 토를 달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순종하는 자의 복’을 교육받았다. 특히 조용기 목사님께서 기도하시고, 전하시는 말씀에 절대로 “왜요?” 또는 “지금은 좀 어렵습니다”라는 투의 대답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직 “예”와 “감사합니다”라는 긍정의 말로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지적 호기심에서 시작된 질문은 좋은 것이지만, 신앙적 결단이나 사명을 앞에 놓고 토를 달거나 핑계를 대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것을 삶을 통해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한국-미국-일본을 일곱 번 옮겨 다니며 이삿짐을 꾸렸다. 그 과정에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는 가정의 일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는 편이었다. 짐을 꾸리는 등 복잡한 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아내는 나의 결정에 전혀 토를 달지 않고 따라주었다. 단 한 번도 이사의 이유를 묻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남편이 ‘순종의 본’을 보이니까, 아내도 그런 남편을 보면서 순종을 실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 묵묵히 순종해준 아내에게 참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오라”


1991년 미국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3천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1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단 1부도 빚지지 않고 순전히 성도들의 헌금으로 건축했다. 나와 교인들은 새로운 꿈과 비전에 부풀어 있었다. 이제는 선교 구제 봉사 등, 모든 분야에서 거침없는 사역을 펼칠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것이다.
성전이 준공될 무렵 주일예배 출석 교인도 1천명을 돌파하게 되었다. 주일예배 찬양대 숫자만 150명을 넘었다. 워싱턴에서 세 번째로 큰 한인교회가 되었다. 더 희망적인 것은 매주 새신자가 적게는 10~20명, 많게는 30~40명씩 등록한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1천명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님께서 헌당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하시던 중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동안 이영훈 목사를 내가 여러분들에게 빌려주었습니다. 이제 다시 이 목사를 한국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교인들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조 목사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박수를 쳤다. 그런데 그 말씀이 현실로 나타났다. 1992년 5월 여의도순복음교회 선교대회에 참석했을 때 조용기 목사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오라.”
조용기 목사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나는 이 목사가 본 교회로 돌아와 나를 도왔으면 한다. 그러나 성령님께 계속 워싱턴에 머물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3개월간 기도하면서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만약 워싱턴에 머물게 되면 그동안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지원한 장학금을 모두 반납해야 한다.”
나는 미국에 유학 와서 여의도순복음교회로부터 매월 1천 달러의 장학금을 받았다. 워싱턴제일순복음교회 장로들은 오히려 잘 되었다는 반응이었다.

“장학금을 모두 반환하도록 하자. 그리고 목사님이 홀가분하게 워싱턴에서 목회를 하시도록 말씀을 드리자.”
워싱턴제일순복음교회 성도들은 한국으로 진짜 부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물질적으로 조금 여유가 있었던 한 권사님은 나를 찾아오셔서 본인이 장학금 전액을 한국에 돌려 보내겠다고까지 제안하셨다.
장로님들이 의논 끝에 조 목사님께 건의를 드렸다.

“조 목사님, 제발 이영훈 목사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이제 막 목회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고 있습니다.”

“본 교회로 돌아가겠습니다”


모든 것을 최종 결정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매일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속으로부터 뚜렷한 내적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이제부터 이곳에서 받을 것은 영광뿐이다.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했다고. 모두 내려놓고 떠나라. 더 이상 뭘 바라는가.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된다.”
나는 조 목사님께 보고를 드렸다.

“목사님, 본 교회로 복귀하겠습니다.”
조 목사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잘 생각했다. 고맙다. 이 목사가 올 줄 알고 거처할 곳을 이미 마련해놓았다.”
나는 지금도 이 판단이 참 옳았다고 생각한다. 조 목사님은 내가 이런 결정을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초원아파트에 거할 곳까지 준비해두셨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해외에서 사역하고 목회자들이 여의도교회의 부름을 받고 복귀할 때에는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는 관례가 생겼다.

어머니는 위대한 스승이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순종의 복’을 배웠다. 삶의 결정적 순간마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주의 종이 기도하시고 결정하셔서 말씀하실 때, 그저 순종하라.”
그 가르침은 지금도 나의 가슴속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한 소년이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와 오랫동안 방황했다. 소년은 깊은 숲과 황량한 사막을 헤맸으나 위대한 스승을 찾지 못했다. 소년은 너무 지쳐서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아, 왜 그렇게 방황하고 있느냐?”
“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노인은 얼굴 가득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마. 지금 곧장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한 사람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올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란다.”
소년은 위대한 스승을 빨리 만나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다. 소년이 대문을 두드리자 한 여인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와 소년을 맞았다. 그 위대한 스승은 바로 소년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최고의 교육자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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