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폭넓은 성령운동을 펼쳐라(10회)

조용기 목사님의 부흥회는 성령의 용광로였다. 언제나 부흥회 때는 사람들이 너무 몰려와 강대상 위에까지도 교인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모든 부흥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다. 부흥회란 부흥회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조용기 목사님은 1년에 한 번은 친히 당신께서 요한계시록 강해로 부흥회를 인도했다. 집회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너무 은혜가 넘쳐났고 또 요한계시록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시간이 부족하여 집회를 일주일 더 연장한 적도 있었다. 나는 두 주간을 매일같이 집회에 참석했다

재림신앙을 갖다


그 집회는 나의 신앙을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예수 재림’에 대한 강력한 소망이 꿈틀거렸다.
‘혹시 내가 오늘 들림을 받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림에 대한 건강한 소망이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고 생각한다. 재림신앙은 개인의 신앙도 크게 성장시킨다. 나도 그때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크게 성장했다고 자부한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종말론적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간절한 믿음이 삶과 신앙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전도관 및 신천지를 비롯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현실을 벗어난 채 오직 자신들만의 왕국을 주장하는 미신적 종말관에만 의존하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조용기 목사님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주님이 곧 오신다. 그러므로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절대로 한 눈 팔지 말고 열심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자.’
나는 ‘한 평생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뿐이었고, 나중에 뭐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꿈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목회자’라는 미래의 그림을 가슴속에 그려나갔던 것 같다. 목회자 외에 다른 꿈을 가질 이유도, 기회도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아기 예수가 주인공이다


이미 청소년기에 예수가 내 삶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서서히 돌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셨다.
이제 곧 성탄절이 다가온다. 사람들은 성탄절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잘 모른다. 요즈음 성탄절의 주인공이 산타클로스로, 성탄절의 의미가 선물을 주고받고 쇼핑하는 명절 정도로 바꿔져 있는 모습을 본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아기 예수한 분뿐이다. 아기 예수가 실종된 성탄절은 빛을 잃은 보석과 같다. 성탄절이면 떠오르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한 여인이 갓난아기를 안은 채 산을 넘어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날은 강풍과 폭설이 유난히도 매서웠다. 폭설은 도로 위의 길을 지워버렸다. 여인은 방황하다가 눈 속에 묻혔다. 이튿날 구조대가 아기를 안은 여인의 모습을 한 눈사람을 발견했다. 눈사람 속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구조대원이 눈을 털어내자, 그 속에서 여인의 나신이 드러났다. 여인은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아기의 몸을 감싼 채 동사(凍死)했다.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과 사랑이 아기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그 아이는 숙부의 손에서 자랐다. 그리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날 숙부는 가슴에 묻어두었던 한 여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청년은 슬피 울면서, 혹한의 겨울에 어머니 무덤을 찾았다. 자신의 외투와 양복과 속옷을 하나씩 벗어 무덤을 덮었다.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무덤을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그때는 지금 저보다 훨씬 추우셨지요? 어린 핏덩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던지신 어머니의 사랑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요.”그 위대한 어머니로 인해 생명을 구원받은 사람이 바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David Lloyd George)다. 1차 세계대전 때 영국 군수장관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영국 사회보장 제도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모습과 자녀를 위해 동사한 어머니에게서 차원 높은 사랑을 깨닫는다.

“교단의 틀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모님과 상의해 장로교 계통 미션스쿨인 대광중학교 진학을 결정했다. 아버님은 가족회의가 끝난 후 내게 말씀하셨다.

“최종적으로 조용기 목사님께 허락을 받고 오거라. 목사님이 허락을 하시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기도를 받도록 하거라.”
나는 대광중학교 입학원서를 들고 조용기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목사님은 “아주 잘 선택했다”며 기도를 해주었다. 대광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는 조금 갈등을 겪었다. 교단 신학교를 갈 것인가, 일반 신학대학을 갈 것인가. 나는 그런 갈등을 안고 조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의를 드렸다.

“제가 교단 신학교와 종합대학교 내 신학과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합니까?”
“교단 신학교보다는 먼저 일반대학 신학과에서 공부하고 교단 신학교에 가도록해라. 이 경우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가도록 하라. 너는 우리 교단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조금쯤 리버럴(Liberal)한 곳에서 폭넓게 성령운동을 펼치는 것도 좋다. 이제는 초교파적인 활동이 필요한 시대다.”
그때가 1973년이었다. 순복음교회가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이사를 오던 해였다.
조 목사님은 이미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목사님은 그만큼 생각이 깊고 넓으셨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가입할 때도 목사님께 문의를 드린 적이 있다.

“우리 교단이 지향하는 신앙과 NCCK의 일부 진보적인 신앙이 좀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 목사님의 대답은 명쾌하고 단호했다.

“진보적인 교회협에 들어가 성령운동으로 바꾸어 놓으면 된다. 진보가 좀 안 맞는다고 해서 모두 등을 돌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진보 속에 들어가서 진보를 변화시켜야 한다.”
조 목사님은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항상 방향을 잡아주셨다. 당시 일부 장로교단에서는 조용기 목사님과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령운동에 대해 강력한 견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나를 오히려 더 멀리 내보내 넓은 시야를 가지도록 인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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