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사막에 나무를 심듯이 복음을 심었다(5회)

조부 이원근 장로님은 4·3폭동 후유증으로 상처와 절망으로 뒤덮인 제주도에 복음의 꽃씨를 심었다. 조부가 재건한 남원교회와 표선교회와 위미교회는 제주도에서 크고 건강한 교회로 자리를 잡았다. 4·3사태의 상처로 얼룩진 그 혼돈과 무질서의 땅에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한 불퇴전(不退轉)의 신앙이 부럽고 자랑스럽다. 그것은 마치 황사가 난무하는 사막에 나무를 심고 꽃을 피우는 작업과도 같다. 눈물겨운 희생과 소명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 그것은 사막에 나무를 심는 작업과 흡사하다.

사막에 풀씨와 꽃씨를 뿌리다
황사의 진원지 중국 모우스 사막에 사는 남자에게 한 여인이 시집을 왔다. 그곳은 이웃도, 나그네도 없었다. 그녀는 절망과 외로움에 몸을 떨었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사막에 사람 발자국이 찍혔다. 반가웠다. 그녀는 사람의 흔적을 오래 남기고 싶어서 세숫대야로 발자국을 덮어놓고 며칠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사막의 황사가 순식간에 그 흔적을 지워버렸다. 여인은 사막한 가운데 생명력 넘치는 숲을 일구기로 결심하고 그날부터 사막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시작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모래밭에 나무를 심고 물을 주었다.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벌레를 잡거나 묘목을 들고 모래 언덕을 넘어 지경을 넓혔다. 그것은 참 힘겨운 일이었다. 첫째 아이는 조산했고, 둘째 아이는 유산했다. 그녀는 셋째 아이를 바구니에 넣고 다니며 사막에 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조롱했다.
“바다에 돌을 던져 육지를 만들 것인가. 사막이 초원으로 변한다고? 그건 무모한 꿈이야.”

여인은 매일 모래 언덕에 풀씨를 뿌리며 사막이 초원으로 변하고, 그 초원 위에 울창한 숲이 형성되는 꿈을 꾸었다. 이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바구니에 넣어서 키웠던 아들은 건장한 청년이 됐다. 그녀가 풀씨와 꽃씨를 뿌린 곳은 온갖 채소와 동물이 사는 생명력 넘치는 땅으로 변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일군 땅은 800만 평, 여의도 면적의 9배에 달하는 크기다. 현재 80여 명이 그녀를 도와 여의도 면적의 40배에 달하는 숲을 일구고 있다. 나무 한 그루의 가치를 아는 이 여인의 눈물이 사막을 숲으로 변화시켰다. 이 여인의 이름은 인위쩐. 모우스 사막 한복판에 숲을 일군 자랑스러운 여인의 이름이다.


신앙적 명령을 생명처럼 여기다
나의 조부 이원근 장로님은 ‘영혼의 사막’을 ‘영혼의 숲’으로 만든 분이시다. 그 놀라운 복음의 열매가 지금도 곳곳에서 주렁주렁 빛나고 있다.
이원근 장로님은 제주도 사역을 마치고 부산에 잠시 정착했다. 부산 영락교회를 세울 때 한경직 목사님을 도와 북쪽에서 내려오신 고현봉 목사님을 담임으로 모셨다. 조부는 화합과 조화의 성품을 가지신 분이었다. 조부가 있는 곳에는 항상 비둘기 같은 평화가 임했다. 그 즈음, 할아버지는 큰 아버지(이경화 장로)를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회와 목사님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너는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영락 교회와 고현봉 목사님을 잘 섬기도록 하거라.”
큰 아버지는 조부의 명령대로 평생 이 교회를 섬겼다. 50년 넘게 교회 수석 장로로서 목사님의 목회를 힘껏 돕다가 갖고 계셨던 물질을 교회에 장학금으로 내놓으시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신앙적 명령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고 끝까지 순종한 큰 아버지도 참 훌륭한 분이다.

원래 큰 아버지는 서문밖교회 청년회장이었다. 믿음도 좋고, 리더십도 뛰어났다. 그 당시 평양을 대표하는 서문밖교회와 장대현교회는 서로 협력하며 평양 복음화를 힘쓰고 있었다. 따라서 두 교회간 잦은 왕래가 있었다. 그때 큰 아버지를 자세히 지켜보셨던 장대현교회 방지일 목사님이 조부를 만나 넌지시 이런 제안을 했다.

“장로님, 청년회장을 하는 아드님이 매우 영특해 보입니다. 신앙도 참 좋다고 들었습니다. 제 막내 고모와 혼사를 시키면 어떨까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일사천리로 혼사가 진행되어 사돈을 맺었다. 결국 방지일 목사님의 고모가 내 큰어머니(방복심 권사)가 된 것이다. 세상은 참 좁고 좁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치밀한 섭리라고 믿는다.

나는 어떻게 순복음교회 목사가 되었나
작은 아버지는 1사단에서 20년 동안 군목으로 사역하다가 중령으로 예편하셨다. 그리고 부산 광안리에 내려와서 광안교회를 섬기면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지어 헌당하시고 예장통합측 부산동노회장과 해외선교부장, 외항선교 회장 등을 지내시며, 목회와 교계활동에 힘쓰셨다. 특별히 해외선교부장을 지내시며 마카오에 신학교를 세워 중국인 목회자를 양성하셨고(지금도 이 신학교는 통합측 교단에서 운영하고 있음), 교회를 30년 동안 섬기시다가 은퇴하신 후 소천하셨다. 그는 유명한 부흥사였던 신현균 목사님과 신학교 동기다. 서울에서 한양교회를 시무하시고, 미국에 가셔서 목회활동을 이어가시다가 은퇴하신 고모부(윤명호 목사)는 소망교회 원로인 곽선희 목사님과 신학교 동기다.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런질문을 받는다.
“목사님은 어떻게 순복음교회 목사가 되었나요? 집안 어른들은 모두 장로교 출신인데요.”

1964년 초, 우리 가족은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45번지로 이사했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이 냉천동 41번지에 살고 계셨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5~6분 거리에 순복음교회가 있었다.
조부 이원근 장로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조부는 매일 순복음 교회로 새벽기도를 다녔다. 약 3개월 동안 새벽기도를 드리신 후 우리 가족을 한 자리에 모았다. 조부는 비장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이번 주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 순복음교회에 출석한다. 내가 3개월 동안 조용기 목사님 설교를 귀담아 들었다. 큰 은혜를 체험했다. 젊은 종인데, 아주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말씀에 은혜가 넘친다.”

그때가 1964년 4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닐 때였다.
당시 조 목사님 나이가 스물여덟이었다. 조 목사님은 우리 가족이 교회에 등록한 이듬해인 1965년 3월 1일 결혼식을 올렸다. 최자실 목사님의 손에 이끌려 들어 오시던 김성혜 총장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시 장로교 신자인 우리(당시 충현교회 출석)가 순복음교회로 교단을 옮긴다는 것은 여간 큰 결단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월남한 여덟 자녀 중 우리 가족을 순복음교회로 옮기도록 조치했다.†

이영훈 담임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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