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손길, 전문가의 한마디가 중요하다!”

작성일2020-09-01

초등학교 2학년 때 울퉁불퉁 뿌리 근육이 드러난 나무를 밟으며 놀던 아이는 발을 헛디디면서 오른팔이 부러졌다. 팔꿈치 아래에서 부숴진 뼈들은 두 번의 수술로 제자리를 잡았다. 6개월 동안 보조기를 껴야 했던 손가락도 자유롭게 펴고 접을 수 있었다. 다만 팔을 들어 올려 어깨를 만지는 동작이 안 됐다. 7부 능선쯤에서 팔은 멈췄다. 오른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만질 수 없다고 해서 인생이 불편한 것은 아니다. 스물다섯 살엔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내리막길을 달려오다 미끄러지면서 팔꿈치 윗부분의 뼈가 근육을 뚫고 나왔다. 두 번이나 부러진 오른팔은 굽히기를 거부했다.
친구로부터 물리치료사를 소개받았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근육통을 관리해주는 실력자라고 했다. 쉽지 않은 비용이었지만 치료를 받았다. 아프지도 않게 30분 정도 근육을 만졌다. 병원에서는 물리치료를 해도 더 이상 굽혀지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한 번의 손길로 아이 팔은 고무가 늘어나듯 어깨를 넘어 귀까지 닿았다. 벌써 몇 년이 되었지만 가끔 아이에게 “오른팔 굽혀 봐” 하면서 그때 전문가의 단 한 번의 손길이 돌려놓은 아이의 팔을 확인한다. 전문가의 눈이나 손길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굳은 근육이야 손에 잡히니 풀 수 있다고 하지만 닫힌 마음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맺힌 곳이 보이지도 않고 손가락에 걸리지도 않는 굳은 마음을 어떻게 만져주면 부드러워질까?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도구는 말이다. 그 사람에 대한 ‘사심 없는 마음’으로 건네는 한마디는 단지 그 사람의 귀에만 머물지 않고 마음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된다. 사심 없는 마음으로 하는 말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채워주는 말이다.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내가 먼저 구별 짓지 않고 상대도 나처럼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사람으로 평등하게 대하면서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런던 시간으로 재택근무 중인 아이는 오후 5시(런던 오전 9시)에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로 하루가 시작된다. 상사의 전화는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통화는 늘 가볍고 즐겁다. 그 상사는 다른 시간대에 사는 아이의 일상을 소재로 대화를 시작한다.
“밤 시간대에 일하느라 힘들지 않은지?”
“자기 허락 없이 털을 깎았다고 우리 집 강아지 라떼가 경찰을 부르지는 않았는지?”
“허리를 다친 엄마는 움직이는 것이 좀 나아졌는지?”
대형 로펌의 파트너가 이제 일을 배우는 아이에게 친구끼리 주고받을 것 같은 작은 이야기를 날마다 물어본다. 그 상사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일을 처리하는 긴장 속에서도, 나의 관심보다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심 없는 마음으로 따뜻한 말을 하는 훈련을 일찍부터 했을 것이다.

아이에게 물어보자
따스한 말이 반복되면 마음의 온도를 1도 올려주어 몸의 면역력을 6배 정도 향상시켜준다고 한다. 빈정거리거나 무시하는 말은 차가운 물방울이 머리에 똑똑 떨어지는 것과 같아서 그 말 한마디는 당장은 아이에게 피 흘리는 상처를 주지 않지만, 동굴 속의 석주처럼 자라나서 아이의 정신을 파괴하게 된다.
주거(住居) 역사는 여성의 동선이 짧아지는 과정이었다. 신발을 신고 마당을 돌아서 가야 했던 화장실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부엌이 거실 옆으로 왔다. 어떻게 하면 한 걸음이라도 주부의 움직임을 줄이고, 한 번이라도 허리를 덜 굽히면서 일할 수 있을까, 주부들이 원하는 집은 어떤 집인지 주부들에게 묻고 연구하면서 발전해 왔다.
아이의 마음을 만지는 부모의 말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마음에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아이에게 물어보자. 무슨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쁜지, 기분이 좋은지, 어떤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새로워지는지. 어떤 말을 듣고 싶은지. 가장 싫은 말은 무엇인지. 물론 아이는 바로 답을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다음부터 생각하게 된다. 아이의 말을 통해서 정답을 다 알 수는 없어도 옳은 방향을 잡을 수는 있다.
아이의 마음을 닫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아이의 마음을 여는 말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이에게 부모가 끝까지 해서는 안 되는 말 한마디를 묻는다면 “나는 너 포기했다”라는 선언이다. 모든 아이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바로 이 말이다.
“너를 포기한다”는 말은 부모가 죽을 때까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뻔히 알면서도 잘못된 길을 가는 아이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은 부모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무리 멀리 갔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안 하는 수동적인 포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기대요 능동적인 행동이다. 나쁘게 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극적인 기대가 아니다.
아이를 꾸짖고 혼내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뭔가를 하기는 쉽다. 그러면 부모 마음이라도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위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해 간절하게 기다리는 힘은 사랑이다. 누구 앞에 내놔도 자랑거리가 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자랑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만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엄마는 더 싫어.” 이렇게 이유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아이를 품에 안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일은 ‘그래도 엄마니까’ 견뎌야 하는 뜨거움이다. 그 뜨거움을 견뎌야 아이와 소통할 수 있다.

해바라기를 샀더니 집에 가서 꽃병에 꽂기 전에 끓는 물에 해바라기 꽃대를 10초 정도 넣었다 빼주라고 당부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죠?” 물었더니 “끓는 물에 넣으면 뽀글뽀글 공기가 나오는데 그때 해바라기 꽃대 속 공기구멍이 열리면서 물을 빨아올릴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구멍이 안 열려서 물을 못 먹으니 바로 시들어요.” “그러니까 뜨거운 맛을 봐야 살 수 있다는 말이네요.”
가장 힘든 일은 희망이 없을 때도 기대를 내려놓지 않는 사랑이다. 그 시간은 해바라기가 끓는 물에 들어가는 순간처럼 뜨겁게 부모 가슴에 화인이 찍히는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가 그 뜨거움을 견딜 때 아이는 스스로 숨구멍을 열어 자기만의 생각을 끌어올려 자기만의 언어로 부모와 소통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 침묵의 시간은 아이보다 부모가 더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다. 붙잡고 설명해야 할 것 같고 무슨 말이든 들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아마추어에서 프로 부모로 바뀌는 시간이다. 전문가의 한마디를 직접 배우게 된다.†

강금주 변호사

지난 30년간 <십대들의 쪽지>를 통해 십대들과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살아온 청소년 전문 상담자이자 발행인, 호주 변호사, 저서로는 <사춘기로 성장하는 아이 사춘기로 어긋나는 아이>, <사춘기 대화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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