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자포자기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작성일2020-07-01

“생판 남인 내가 봐도 이렇게 예쁜데 내 손녀면 얼마나 예쁠까요. 좋으시죠?”
“말도 마. 다른 사람하고 사진 나눠 보는 것도 아깝다고 하면 말 다했지.”
평소 그분의 절제된 언어습관을 생각한다면 손녀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남다르고 간절한 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하고 나눠보는 것도 아깝다는 마음은 내 자식일 때는 더 했을 것이다. 그땐 아이를 키우는 일에 치여서 그 감정을 들여다보고 표현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깝던 아이가 어느 순간 얼굴 대하기도 불편하고 아침이면 말 붙이기도 꺼려지는 존재가 되는가 싶더니 “내 자식이 괴물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부모의 눈이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아이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첫날부터 그 아이는 지나치게 성실한 모습이었다. 중학교 3학년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말이나 행동은 어른의 눈에는 기특하고 편한 칭찬거리뿐 허튼 구석이 없었다. 웃음소리마저도 조용했다. “선생님이 며칠 너를 지켜보니까 넌 너무 성실해. 그게 너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 그렇게 성실하지 않아도 돼. 늘 그렇게 성실하게 살면 힘들잖아. 가끔 놀아도 되고 쉬어도 돼.”
아이는 처음에 이게 칭찬인가 꾸중인가 구분이 안 되는 표정이더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말했다. “여태까지 저한테 놀아도 된다, 덜 성실해도 된다는 말을 해준 사람은 없었어요. 늘 목사님 딸이니까, 큰언니로서 동생들이 보고 있으니까 더 열심히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말만 들었어요.”
이 만남으로 그 아이는 내가 자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는 편한 사람이라는 무조건적 신뢰를 갖게 되었다. 다섯 형제의 맏딸이었던 이 아이가 좀 덜 성실하고 가끔 놀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하루 만에 태도가 바뀌거나 성실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잘해야 한다, 누군가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없으니 같은 일을 해도 편하고 실수를 해도 불필요한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성실했던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면서 ‘머리가 아프다’ ‘어지럽다’면서 하루 이틀 결석을 하고 조퇴를 하는가 싶더니 1차 시험을 치르고 나서는 학교를 가는 날보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부모는 아프다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한의원으로, 약국으로 모든 길을 찾아봤지만 뚜렷한 병명도 없이 아이는 아프고 어지럽다면서 집에서 뒹굴거리다 겨울방학이 끝나는 시간이 되었다. 1월 마지막 날 부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달이 지나면 고3인데 이렇게 고3이 되면 학교를 자퇴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싶으니 아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지방에서 새벽 차를 타고 올라온 아이를 만나서 오후 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밥도 먹고 카페도 갔다. 헤어지면서 몇 가지를 약속했다.
“서점에 들러 지난 10년 수능 수학기출문제집 사기. 가고 싶은 대학교 정문에서 인증샷 찍기. 집에 도착하면 오늘밤부터 수능 문제 풀이과정과 답을 노트에 정성스럽게 옮겨 쓰기 등. 한 달 동안 집중해서 노트정리를 하다 보면 네가 가졌던 공부 습관이나 공부하면서 느꼈던 뿌듯한 기억들이 살아날 거야…….”
3월 2일. 가지런히 정리한 묵직한 노트를 택배로 받았다. 노트 정리를 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주변에서 친구들이 뭐라고 했는지,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마지막에 60%를 정리했으니 “제가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갈 확률은 60%일까요?”라는 질문도 함께 왔다.
난 그 아이에게 답을 보냈다. “넌 네가 원하는 대학교에 110% 합격하게 될 거야. 가장 어려운 일은 책상에 앉아 노트정리를 시작하는 거였어. 시작이 반이라고 네가 수학문제를 정리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50%를 완성했고 한 달 동안 60% 정리를 끝냈으니 사실 넌 110%를 해낸 거야. 넌 네가 원하는 대학교에 갈 거야.”
이건 말장난이 아닌 나의 진심이었다. 아이는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해 4월에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운명을 만났지만 자기가 가고 싶어 했던 대학교에 입학했다.

동굴이냐, 터널이냐
적당히 놀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눈치껏 하는 아이들은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자기가 하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곧이곧대로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던 아이들이 잠깐 엇나갔을 때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한 채 ‘나도 몰라. 어차피 잘 하기는 틀렸는데 될 대로 되라’ 하면서 모든 것을 놔 버렸을 때다.
조용히 절망하면서 자신을 향한 기대를 접고 잠만 자거나, 방에 틀어박혀서 드라마에 빠지거나 핸드폰만 바라본다. 굳이 PC방으로, 노래방으로 나가야 할 필요가 없다. 핸드폰을 들고 들어간 자기 방이 가장 위험한 동굴이 된다.

‘자포자기’라는 도구로 스스로 파고 들어간 동굴에 갇힌 아이를 바라볼 때, 드러난 행동을 나무라기 전에 아이가 피하고 있는 두려움을 같이 들여다보고 나눠야 한다. 부모의 자랑이던 아이들이 바뀌면 부모는 아이보다 더 당황하고 화를 내기 쉽다. 여태껏 잘하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왜 딴짓을 하느냐며 몰아붙이게 된다. 지금까지 알아서 잘해준 것이 고마워야 하는데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고 지금 벌어진 상황에 화를 내면서 ‘너를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이의 행동이 부모의 무관심이나 부모의 불찰이 아닌 아이 혼자만의 잘못이나 게으름, 혹은 부주의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열심히 잘하던 아이가 자포자기의 동굴에 갇혀서 꼭 해야 할 일마저 하지 않고 있을 때, 누구의 잘못인가 따지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아이가 멈춘 곳이 동굴이 되지 않고 가장 힘든 곳을 안전하게 통과하는 터널이 되도록 함께 걸어가는 행동을 해야 한다. 탓하고 나무라면서 아이 홀로 두면 동굴이지만 부모가 묵묵히 같이 하면 동굴은 어느 순간 출구가 있는 터널이 되는 것이다.
세상엔 완벽한 부모도 완벽한 자식도 없다. 그러니 완벽한 부모가 되려는 욕심도 완벽한 자식을 기대하는 허영도 내려놓자. 그러면 아이를 대하는 마음도 편해지고 내가 나를 담금질하는 시간도 줄어든다. 부모인 내 마음이 편하면 아이도 편한 마음으로 자기를 대하게 된다. 아이들은 잘하다가 한두 번씩 멈추기도 하고 딴 길로 갔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한 번도 부모 가슴 철렁 내려앉게 하지 않고 크는 아이는 없다. 그렇게 믿었던 아이에게 작은 배신을 당하면서 부모도 이력이 생기는 것이다.†

강금주 변호사

지난 30년간 <십대들의 쪽지>를 통해 십대들과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살아온 청소년 전문 상담자이자 발행인, 호주 변호사, 저서로는 <사춘기로 성장하는 아이 사춘기로 어긋나는 아이>, <사춘기 대화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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