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3. 그리스도의 사역

1) 죄의 용서
어느 곳에 말할 수 없는 불량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타일렀으나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식을 불러 기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앞으로 네가 나쁜 짓을 할 때마다 이 기둥에 못을 하나씩 박도록 하겠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 아들은 거기를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못이 10개나 박혀 있었다. 그는 멋진 기둥에 못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자기의 비행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거듭난 사람처럼 착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 들이 착한 일을 할 때마다 기둥에서 못을 하나씩 빼기로 했다. 이윽고 기둥에 박혔던 못이 다 뽑혔다. 그리하여 못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이유는 못은 다 뽑혔어도 기둥에 남은 흔적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못 자국을 보면서 지워버릴 수 없는 자기 죄의 무서움을 알고 탄식했다는 이야기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시리라 믿고 있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죄를 범한 자는 자기 자신이 범한 죄를 변상할 자격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는 전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변상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축복이요,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1-2


2) 말씀이 육신이 되심
헬라사상에 의하면 영혼보다 육체는 천박하며 하늘보다 땅은 허무하고 정신보다 물체는 변화무쌍한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쾌락주의에 도취되기도 한다. 땅에는 희망이 없고 죽음과 고통이 있을 뿐이며, 인생이란 뜬구름처럼 허무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헬라인들의 통념이다. 그러나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심으로 어둠이 물러가고 고뇌의 생명이 빛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성육신의 진리이다.
슈바이처(Albert Scheweitzer)는 말하기를 “진정한 크리스천의 사역은 성육신을 실천하는 데 있다”라고 했다. 높은 이상과 진리만 있고 실천이 없을 때 그 이상과 진리는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성육신을 실천 하기 위하여 아프리카 람바레네 촌에 몸을 던졌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며 아파하는 자를 치료해 주기 위함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육을 입고 세상에 오 심은 인간들에게 겸손의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에서 범죄했으나 둘째 아담인 예수는 사람들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겸손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다는 뜻이다. 이것을 겸허설이라 한다.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려면 인간의 상황에 오셔서 인간처럼 낮아질 때 진정한 인간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 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6, 7


3) 제자를 삼으심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 “나를 따르라 ” 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 여기에서 믿으라는 말은 신자가 되라는 말이요, 나를 따르라는 말은 나의 제자가 되라는 뜻이다. 신자가 되는 일 과 제자가 되는 일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먼저 제자는 어디든지 주를 좇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결단력 없이 주를 따른다는 것은 참 제자 의 자세가 아니다. 제자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주를 좇는 자가 되어야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일은 자식의 첫째 의무요, 인간의 기본 도리이며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제자의 사명을 최우선적으로 하라는 뜻이다.
사도를 ‘아포스톨로스’ (Aposto los)라 하는데 대리자란 뜻이다. 법정 대리인처럼 권한 대행도 가능하며 전권대사처럼 권력 행사도 할 수 있는 직책이다. 그러나 예수의 열두 제자는 예수의 대언자, 대리자들로서 지상에서의 천국의 실현 이 최상의 사명이며 복음을 증거할 최우선의 직책수행자들이다. 제자는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 라 하시니” 요 21:1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 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 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 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 9:59, 60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62


4) 예수의 교훈
예수의 사역 방법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첫째 는 케리그마적(선교적) 사역이요, 둘째는 디다 케적(교육적) 사역이다.
케리그마적 사역은 그의 탄생에서 승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활동하신 삶을 말한다. 디다케적 사역은 그의 교설, 그의 비유, 그의 윤리, 그의 종말론 등을 말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2절 에서 “입을 열어 가르쳤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디다케적 사역을 행하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예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첫째, 천국 백성의 신앙 자세와 윤리, 둘째, 천국 생활의 원리로서의 비유, 셋째, 종말론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교훈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7)와 ‘양과 염소의 심판’(마 25:31-4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는 믿음과 행함 그리고 정신적 내면성과 순수한 이웃 사랑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였다.
예수의 중심 교훈은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는 말씀은 곧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라는 뜻이다. 예수는 디다케적 사역을 통하여 한 사람이라도 천국 시민이 되도록 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1, 22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 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1, 42


5) 예수의 복종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복종 한 인간이었다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야말로 예수의 신앙의 극치이다. 죽음 앞에 설 때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약해지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이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다. 만일 신뢰할 수 없다면 어느 누가 자신의 무릎을 꿇고 철저하게 복종하겠는가?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복종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완전히 자기를 지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때 인간의 불안과 고뇌는 물러가고 참 평안과 행복이 도래한다.
도널드 베일리(Donald Bailey)라고 하는 영국 신학자는 이러한 신앙 경험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역설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28


6)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기독교 신앙에는 두 기둥이 있다. 십자가의 신앙과 부활의 신앙이 바로 그것이다. 십자가 신앙을 살펴보자.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을까? 십자가는 로마법대로 하면 로마 시민권이 없는 노예나 이 방인을 처형할 때 사용하는 형틀이었다.
십자가는 죄인들이 달리는 것이며 죗값을 치르는 고통의 기구라 할 수 있다. 통속적인 개념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담당해야 할 고통과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다. 그러나 십자가를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 죽은 십자가는 형벌의 십자가가 아니라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이 아니라 희생적 사랑이며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비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몰트만(Jurgen Moltmann )은 그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의 부르짖음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은 당신 자신을 버리셨나이까?”라고 표현했다 . 십자가를 지신 분은 사람이 아닌 사람의 몸을 입은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 때 십자가는 형벌이 아니라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부활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의 승리를 보장하는 계시적 사건이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죽음에 불과하다. 누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하나님을 따르겠는가?
하나님을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십자가의 비의는 완전히 벗겨졌다. 최후의 승리를 친히 보여 주신 것이다. 신자들의 영원한 내세에 대한 확실한 보증인 것이다. 십자가 있는 곳에 반드시 부활이 있다. 때문에 윌캔스란 신학자는 부활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 증명’이라고 했다. 독일의 브룸하르트 목사는 승리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예수는 모두 원수 이기는 승리의 주, 온 세계 모든 것 그 앞에 엎드리겠네. 예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어둠을 몰아내고 나를 그 빛으로 인도하시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 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6, 17



7)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범죄하기 전에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으나 범죄한 후 진노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사랑의 관계는 곧 자유와 평화의 관계인 반면 진노의 관계는 불안과 절망의 관계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크게 불안을 느끼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탓이며 죽음 앞에서 절망에 떠는 것도 영원한 세계와의 단절 때문이다.
죄로부터 오는 불행과 고통은 하나님의 진노 상태이지 자유와 평화의 상태가 아니다. 이러한 진노상태에서의 인간의 살 길은 인간 자신의 지혜와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의에 무력할뿐더러 죄에도 무력하여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다.
절망에 빠진 탕자를 구원하는 길은 아버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긍휼과 자비, 사랑뿐이다. 탕자 자신은 죄에 오염되었다. 고로 인간이 희망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하나님의 사랑뿐이다. 만일 사랑이 없으면 그의 진노는 영원한 멸망을 초래하고 만다. 십자가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며 화해의 계시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의 화해의 상태는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가 죄를 이긴 것처럼 우리도 이겨야 하며 그가 화해의 사역을 다한 것처럼 우리도 화해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과 화해한 자의 생활은 먼저 자신이 화해자가 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사랑을 실천한 것처럼 사랑을 생활의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8, 19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 \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8)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혹은 ‘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에 대하여 여러 번 언급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나라인가?
첫째, 슈바이처와 불트만(Rudolf Bultmann) 은 ‘연속적 종말론’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통치권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현재 지상에 실현된 것이 아니라 장차 새 시대에 올 것으로서 아직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알렌(S. Aalen)의 이론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형태가 이 지상에 나타나야 하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은 나라이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 되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 주권은 순전히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국한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넷째, 다드(C. H. Dodd)는 예수의 성육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지상에 실현되었다고 주장했다.
다섯째, 큄멜(J.K ummel)은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인 면과 미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는 이 나라가 곧 도래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예수는 그 나라가 자기 자신 안에서 실현된다고 했다. 이미 예수와 함께 역사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에 의해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가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복음적이다.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사명이다. 다시 말하면 천국 시민은 그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면서 아직 소유하지 못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가만히 앉아서 예수의 재림만을 기다리는 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인 동시에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도구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모여서 교제하며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교회와 크리스천의 사명이다.

최재화 (감독)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연회 감독이며 명암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중인 최재화 감독은 협성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아세아학원을 수료, 감리교신학대학교 선교대 학원 졸업,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연수를 했다. 겨레사랑선교회 이사, 성남시 기독 교연합회 부회장, 감리교 홍보출판국 위원, 기아대책 성남지역 이사, 기독교대한 감리회 중앙연회 총무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평신도대학』, 『예수님, 어떻게 믿을까요?』가 있으며 『트리니티말씀대전』을 편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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