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약자들을 위한 교회
성경 속에서 야훼 하나님은 사회의 밑바닥 계층을 이루고 있는 고아와 과부와 유랑하는 사람들과 가난한(궁핍한) 사람들을 억누르지 말고 정의롭게 대하며 잘 돌보라고 누차 명령하고 계시다(신 10:18; 사 1:17; 슥 7:10 등). 가난한 이웃에게 인색하게 굴며 손을 움켜쥐지 말고 오히려 손을 활짝 펴서 그가 필요한 대로 넉넉하게 주라고 하셨다(신 15:7~8).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경제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생존의 기본이다. 상승 하던 한국경제가 심각하게 둔화되고, 500만 명이 넘는 자영업자들과 그에 딸린 일꾼들의 수입원이 줄어들고 기타 경기지표들이 하강하면서 사회에 냉랭한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 이럴 때에 가진 자와 없는 자의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좌절하고 있다.
서울의 어느 다가구 주택에서 가족 네 명이 “하늘나라에 간다. 힘들었다”는 유서와 빚독촉장 20여 장을 남기고 자살했는데 주민들이 한 달이나 지나서야 발견했다(2019. 11. 4.).1)
이런 안타깝고 슬픈 사건은 목숨을 걸고 탈북하여 서울에 정착한 새터민들에게 서도 일어나고 있다. 작년 7월 31일에는 탈북여성(42세)과 여섯 살 난 아들이 성경책 하나 외에는 물, 쌀, 가스 다 없는 텅빈 방에서 숨져 있는 것을 주민들이 발견하였다. 2) GDP 3만 달러라고 자랑하는 나라에서 이게 웬일인가? 성경책 하나 놓고 죽은 탈북민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어느 교회와 연관이 있었음직한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서글프다.
사회가 이렇게 가서야 되겠는가? 정부가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가 추락하면 할수록 교회와 신자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뒤집어 생각해보면 보람된 기회가 될 수 있다.
돕는 방법(쩨다카): 가능하면 도움을 받는 자와 남이 모르게 하라
성경 속에서 야훼 하나님은 사회의 밑바닥 계층을 이루고 있는 고아와 과부와 유랑하는 사람들과 가난한(궁핍한) 사람들을 억누르지 말고 정의롭게 대하며 잘 돌보라고 누차 명령하고 계시다(신 10:18; 사 1:17; 슥 7:10 등). 가난한 이웃에게 인색하게 굴며 손을 움켜쥐지 말고 오히려 손을 활짝 펴서 그가 필요한 대로 넉넉하게 주라고 하셨다(신 15:7~8). 야훼는 심지어 고아들과 과부들과 유랑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잘 먹이는데 사용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라고 명령하셨다(신 14:22~29, 26:12).3)
유대교에서는 남을 돕는 자선행위를 ‘쩨다카’(tzedakah)라고 한다. 4) 이것을 일반 적으로 자선, 구호, 구제 따위로 번역을 하는데, 실은 이것은 정의(正義)라는 뜻을 가진 쩨덱(tzedek)에서 온 단어이다. 야훼는 사람이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제사를 받는 것보다 더 기쁘다고 하셨다(잠 21:3).
성경에서는 정의가 사회의 경제취약계층을 돕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쩨다카는 자선이나 구제를 하는 것이지만 정의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Robinson:236). 그렇다면, 남을 돕지 않는 사람은 정의롭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탈무드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창피하거나 굴욕을 느끼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Robinson:237). 예수께서는 남을 도울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3~4). 바빌론 탈무드에도 은밀하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모세보다 위대하다고 하였다(Bava Bathra 9b; Telushkin:14). 야훼는 형제가 가난하게 된 경우에는 같이 살게 하고 도울 것이며, 도우면서 이자를 받거나 이익을 바라는 건 금지하셨다(레 25:35~37).
위에서 본대로 같은 유대인에게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면 안 되는 것이 유대교의 법이다. 그러나 장사를 하는 이방인들에게서는 이자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중세에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경향이 있다. 15세기 랍비 아브라바넬은 기독교와 이슬람은 유대교에 뿌리가 있으니 그런 종교의 신자들에게서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가르쳤다(Robinson:240). 또한 유대교에서는 공짜로 받아쓰면 사람이 저열해진다고 해서, 무이자로 대출이나 융자를 해줘서 자립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무이자 대출회사가 많다. 유대인 이민자들이 미국에 정착할 때 에도 이러한 제도를 발판삼아 부유하게 되었다(Telushkin:11~12). 유대교에서는 고 아들을 돌보는 방법 중에서 입양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하여 아이들을 입양하여 길러내는 양부모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재미있는 것은 레위족이나 제사장족의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는 입양을 가서도 그 신분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탈무드는 입양해서 기른 부모는 그 아이를 육체적으로 낳아 기른 부모로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입양된 아이와 입양한 부모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는 것이다(Robinson:143~144). 입양은 실질적으로 고아를 정상인으로 만들어주고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보호하며 장기적으로 육성하는 방법이므로 희생과 정성이 필요하지만, 가장 확실한 쩨다카라고 하겠다.
야훼 하나님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데 태만한 종교인들, 즉 십일조를 다른 데에 써버리는 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 하고도 ‘우리가 당신에게서 무엇을 훔쳤습니까?’라고 대든다. 너희들은 십일조와 봉헌물을 훔쳤다”(말 3:8). 이것은 누구에게 하신 말일까? 십일조를 내지 않은 유대인 신자들이었을까? 그것은 진실의 반밖에 안 된다. 십일조를 걷어 들이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도 하신 말씀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목사들에게도 하신 질책이다. 하나님이 십일조와 봉헌물들을 가지고 싶어서 그랬을까? 아니다. 그것들이 고아들과 과부들과 나그네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 않게 내지 않고 있거나 낸 것이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제사장이나 성전 기능직분자들)에게 가니 분노하셨던 것이다.
깊은 신앙, 관대한 베풂
그에 대해서는 예수께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시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걷어 들이면서5) 정작 더 중요한 정의, 자비, 신앙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 위선자들이며 화를 당할 것이라고 책망하셨다(마 23:23). 신앙에 근거한 정의와 자비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는 것이다. 신앙이 없는 악인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잠 29:7).
정의와 자비는 사회적 약자들, 더 정확하게는 경제적 약자들인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인데, 그들은 십일조는 떼어먹고 베풀어야 할 정의와 자비는 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즉 야훼와 예수는 일관되게 재물을 사용하지 않고 경제적 약자들을 방관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정죄하였다. 예수는 돈은 관대하게 베풀고 믿음은 깊게 가지기를 촉구했다. 그래서 그 반대로 가는 사람들, 예를 들면 과부를 경제적으로 돕기는커녕 착취하고 기도는 길게 하는 자들이 심하게 벌을 받을 것이라고 단언하셨다(막 12:40; 눅 20:47). 즉 신앙은 흘러넘치는 것 같은데 경제적으로는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냉랭해지고 사랑이 없고 공동체의 유기적 관계가 흐트러지는 것이다. 성경은 이 상황을 방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대개 교회들은 고아들이나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 그리고 통칭해서 가난한 사람들인 경제적 약자들을 실질적이고 꾸준하게 돌보는데 소홀하거나 대충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신앙과 자선은 동행인데, 자선이 기도보다 우선이라고 유대교에서는 가르친다. 심지어 금식기도를 하는 이점은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Berakhot 6b). 탈무드의 이 가르침을 중세 유대인들은 이렇게 해석했다. 금식을 하면 양식, 즉 돈이 절약이 되니 금식을 하는 동안만큼 절약될 금액을 우선 자선(쩨다카)에 베푼 다음에 금식기도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실천하였다(Telushkin:17~18).
깊은 신앙, 관대한 베풂
경제적 약자들을 돕는 일을 위해서 십일조를 내거나 구제금을 내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일이었다. 예수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 통에 렙돈 두 개를 달랑 넣는 것을 보시고 누구보다 많은 헌금을 했다고 칭찬하셨다(막 12:42~44; 눅 21:3~4). 왜 이 여자가 칭찬을 받았는가? 과부는 구제의 대상인데, 헌금을 하여 구제하는 일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탈무드는 모든 사람이 쩨다카를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큰돈을 한꺼번에 내는 것보다는 조금씩이라도 계속하여 남을 돕는 습관을 들이는 것을 더 좋게 여기고 아이들이 쩨다카(돕는 행위)로 헌금을 하는 습관이 들게 훈련시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가진 것이 없고 남을 돕는 것이 자기의 생활에 위협이 될 형편에 있는 사람은 돈을 내지 않고 말로 위로하고 따뜻하게 해 주라고 하였다(Robinson:237).
신약성경은 경제약자를 도우라고 하며 동시에 도움을 받은 자는 스스로 자립하라고 가르친다. 각자 자기 손으로 일을 해서 벌어 먹고(살전 4:11), 일하기 싫어하는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지 말라(살후 3:10)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탈무드는 아예 학자들이나 랍비라도 공동체의 도움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하찮은 일이라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가라고 했고 실제로 그들은 노동을 하면서 학문을 하거나 회당을 섬겼다(Robinson:238).
20년 동안 미국 월드비전 대표를 지낸 리처드 스턴스는, 지미 카터가 노벨평화상 수상연설에서 현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고 보편적인 문제는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격차가 점점 커지는 것이라고 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스턴스: 105~106). 깊이 생각해보면, 카터는 경제빈곤을 극복한 한국과 세계적인 부흥을 이룩한 한국교회의 치명적 결함을 정확하게 포착하였다. 한국 사회에서 그 격차를 누가 좁혀 주고 메꾸어 줄 수 있겠는가? 교회와 신자들이 아니겠는가? 한국의 미래 경제전망은 어둡다. 더 많은 경제약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자살하고 방황할 것이다. 그들을 품고 같이 살며 더 나은 앞날을 기약할 수 있는 한국교회로 도약하기를 바란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도움을 베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소설 <연을 쫓는 아이>에서 주인공 아미르의 아버지 바바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죄는 오직 하나 뿐이다. 오직 하나! 그것은 도둑질이다. 나머지 다른 죄들은 다 도둑질의 변형일 뿐이다”(Hosseini:17). 이것은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므로 그로 인해서 사회에 ‘정의, 자비, 신앙’이 없는 온갖 병리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는 성찰이 필요하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풍부하게 돕는 일은 경제위기를 이겨내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실천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십일조를 풀어서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고, 무이자 대출을 많이 해 주어서 그들이 자립하게 하고,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을 입양해서 육성해 주어야 한다. 과연 그럴 수 있게 교회가 체질개선을 할 수 있겠는가?†
주) ---------------------------------------------------------------------------------------------------------------------------------------------------------------
1)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04/2019110400074.html
2)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13/2019081302978.html
3) 십일조는 레위인들에게 주는 보수로도 사용되었다(민 18:21; 신 14:22~29, 26:12).
4) ‘쯔다카’라고 적는 것은 히브리어 모음 슈바를 무시한 건데, 실제 유대인들의 발음을 들어보면, 반모음 정도로 발음해서 ‘쩨다카’로 적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영어로도 모음 e를 넣어서 tzedakah로 적고 있다.
5) 이 구절을 대개 ‘십일조를 낸다’고 번역을 하는데, 헬라어 문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십일조를 받는다’로 번역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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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세진 (교수)
에티오피아 악숨발굴단 단장, 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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