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새로운 도전, 의사들의 선생이 되다

예방의학 장교로서 월남전에 참전했다.

김 박사는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찾아서라도 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당시 한국에서는 알아주지도 않는 예방의학을 전공하고 스물다섯의 나이에 예방의학 장교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처음에는 막사도 없이 천막을 치고 환자들을 돌봤다. 도처에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헬리콥터로 이동 중에 적군이 밑에서 총을 쏘고, 어느 날은 오토바이를 타고 순식간에 지나가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부비트랩이 터져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어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여러 차례. 그러나 이상하게 두렵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강제적으로 외우게 했던 시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여러 차례 느꼈지요. 월남에서 보낸 2년 동안 제가 깨달은 것은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 죽을 것인데 예수님을 잘 믿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앞선 미국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196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에는 무시도 많이 당했다. “현미경을 본 적은 있느냐”, “아직도 너희 나라는 길가에 오줌, 똥을 싸느냐”며 약소국가의 서러움도 본의 아니게 느꼈다. 그러나 매사에 근면 성실한 김 박사를 모두 인정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2년간 내과에서 근무하고 1971년 방사선과가 생겨 컴퓨터 단층촬영(CT)으로 진단치료를 하게 되었다. 처음 CT가 도입됐을 때 수술도 하기 전에 환자의 몸 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이후 내과의 새로운 분과인 핵의학(동위원소라는 방사성 물질을 사용해서 환자를 진단•치료하는 학문)이 생겼다. 암 발견과 치료에 중심이 되는 이 학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난치병인 암 전문의가 되었다.

어느덧 50년이 넘는 시간을 병원과 연구실, 강의실에서 보냈다. 그는 안정된 삶보다는 도전하는 데서 기쁨을 찾았다. 지금은 자신의 배움을 기꺼이 후배들에게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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