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은 거짓 신들의 전쟁터

내 안의 바로를 보다

4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땅에서 살고 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 시간을 보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전과 후의 시간으로 확연히 구별된다.
모태신앙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낯설지 않은 환경 속에서 자란 나였지만, 학창시절 주변 친구들로부터 들은 평가 중 하나는 “넌 친구가 네 앞에서 죽어가도 모른 척하며 살 수 있는 애야”였다. 그 말이 맞다는 듯이 나는 ‘나랑 무슨 상관인데…’라며 생각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20대 초반 주님을 다시 만났다. 대속물이 되신 그 주님이 다시 보여졌다. 세상을, 이웃을 나를 위한 조연으로 여기며 스스로 얼마나 높아져 있었는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교회를 안 다닌 것이 아니었다. 예배도 드리며, 수련회도 가고, 내 죄를 사하신 예수님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주님 또한 나에겐 조연으로 존재하셔야 했다. 그저 나를 도와주는 가장 강력한 신으로 계셔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높아진 자였기 때문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히브리 인(건너온 자)으로 애굽에서 애굽인들과 조금의 구별로 살았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야훼이신 그 이름을 알리셔야 했던 것처럼 나에게 주님은 그렇게 나타나셨다.
스스로 존재하며 모든 것을 내 임의대로 재정렬하며 살았던 나는 바로 중의 바로였다.

옆에 있는 이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인지, 또한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열방의 이웃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지를 말씀에서 정의하신 기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이웃들을 섬기게 되었다. 먼저 가족들에게 회개의 삶을 나누기 위해 겉모습이 아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원하여 일어났다. 연세가 많으신 부모님의 말씀에 맞다 틀리다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비추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 같으니 우산을 가져가라는 모친의 말에 강수량 20%의 뉴스 정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옳다고 내가 편하고자 모든 것을 끌어오는 일을 적극적으로 그만하고 싶다.
그래도 작다고 여겨지는 일은 할 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섬겼던 지체로부터 분리의 통보를 들었다. 주님을 따라 선을 행하고자 했던 일의 결과가 이것인가 싶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섬겼는지, 그 지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말하며 내가 의롭다고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섬겼던 손이 영광스러워지지 못하고 이름 이 땅에 떨어져야 하는 사건을 앞두고 나를 위해 일하시며 하나님을 부리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파는 자에게 팔리시며 투쟁하지 않으시는 주님, 이것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주님의 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대속물이 되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그 아들을 믿는 믿음을 오늘도 구한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발버둥치는 애굽(미쯔라임: ‘좁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에서 야훼이신 주님을 부른다.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배우며 날마다 죽고 주님으로 살아가는 그 길을 진정 사모한다.†



노라 선교사•J 국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