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우 목사의 코로나19는 교회혁신의 기회다] <17>성도를 늘리라?… 예수님은 “제자 삼으라” 말씀하셨다

작성일2020-12-03

서울 좋은나무교회 청소년들이 2018년 8월 지리산 노고단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강우 좋은나무교회 목사는 수시로 교회 청소년과 산행을 하며 제자도를 전수한다.

“성도 100명과 제자 1명 중 선택하라고 하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목회자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대부분은 성도 100명을 선택할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목회자의 태도를 점검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 역시도 이 질문 앞에 성도 100명 선택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눈앞의 ‘성도’를 선택하고 ‘제자’를 선택하지 않는 결과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보여준다. 당장에 성도 100명이 교회에 유익할 것 같지만 그들은 장래 기약이 없는 군중이 될 수 있다.

성실한 성도라고 생각했지만, 주일 비신자들과 함께 캠핑가서 영상예배를 드린다고 휴대전화를 켜놓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텐트 치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수영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예배에 집중할 수 있을까.

오늘날 한국교회 현실은 성도 수에 집중한 결과다. 성도 100명을 선택하겠다는 사고 속엔 드러나지 않았지만, 목회자의 야망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지 성도를 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자 ‘신앙 소비자’였던 군중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벌판에 모였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기복을 바라는 군중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12명의 제자에게만 집중하셨다.

왜 코로나19 사태 속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가. 제자도를 가르치지도 않고 제자를 만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흩어지면 곳곳에 교회를 세웠다. 제자였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성도들이 흩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19가 교회공동체를 와해시킬 수 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거리두기를 하면서 흩어지는 이런 일들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단순히 모인 군중 수준이 아니라 흩어졌을 때 교회를 세우는 제자가 돼야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보는 신앙 소비자로 머물러선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많은 교회가 제자를 세우는 데 실패하는 것일까. 가르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제자를 키우기보다 사변적 신학, 지식을 전수하는 전달 장소가 돼 버렸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한 박윤선 박사는 신학생들을 만나면 늘 휴학하라고 하셨다. 교회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고 다시 와서 공부하라는 뜻이었다. 신학을 공부한다고 제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하신 것이다. 혹자는 기도를 많이 하면, 설교를 잘하면, 달란트가 많으면, 성경을 많이 알면 목회를 잘한다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목회를 잘하는 사람은 설교가 좀 어눌해도, 성경 지식이 좀 모자라도 바보같이 예수님만 따라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제자를 키워내는 사람이다.

제자를 세우는 것은 집단으로 가르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1m 앞의 사람이 1m 뒤에 오는 사람을 가르치며 삶으로 보여주며 세워가는 것이다. 먼저 경험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는 것이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정신, 제자도 정신이다. 이것이 교회에 정착될 때 변혁이 일어난다.

제자도 훈련은 어떻게 해야 하나. 목회자는 성도 전체를 자신이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접어야 한다. 목회자는 큰 틀을 제시하고 성도들이 직접 성도를 가르치게 해야 한다. 인원도 너무 많으면 안 된다. 적은 숫자를 유지하며 그들끼리 나누고 부딪치고 감싸 안으면서 따라 배우게 해야 한다.

서울 좋은나무교회는 주일학교에서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도록 독려한다. 그러기 위해선 목회자가 먼저 어린이 제자를 키워야 한다.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강원도 설악산 등반을 하는 것도 산행하면서 제자로 부르신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목회자가 한 아이를 세우기 위해 피땀 흘리는 모습을 보일 때 순종하게 된다. 거기에 성령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

주님은 똑똑한 사람을 제자로 세우지 않으셨다. 제자는 대부분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다. 학식이 뛰어난 사람보다 고기 잡는 어부를 제자로 세우는 게 훨씬 수월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마태나 삭개오처럼 자기 과시욕이 컸지만, 진리에 대한 갈망이 큰 사람도 제자로 불러주셨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왜 제자 삼는 일을 등한시하게 됐을까. 100명의 성도를 모으는데 바빴지 1명의 제자를 길러내는 데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돈 많고 지식이 많은 사장, 공무원, 박사, 대학교수는 지도하기 쉽다. 그런 사람을 장로로 뽑아놔야 성도를 가르치고 지도하기도 쉽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자 그 같은 교회의 허약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목회자는 정말 제자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 눈여겨보고 그 사람과 함께 삶을 나누며 제자로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또 다른 누군가를 제자로 세워야 한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다. 무리는 흩어질지라도, 교회는 영원하다. 아무리 고난이 다가와 성도를 흩어놓더라도 그들이 제자라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목회자는 성도를 제자 삼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적인 사람들이다. 처치 이노베이션은 한 명의 성도를 제자로 세우는 일에서 시작된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5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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