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사회,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이 폭력을 이긴다

대한민국의 일상화 된 폭력


요즘 뉴스를 보면 폭력에 대한 이슈들로 가득하다.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고, 연인이라는 이유로 데이트 폭력을 가하는가 하면, 가족 간의 폭력과 인터넷 상의 사이버 폭력 등등, 폭력이 일어나는 장소와 폭력의 형태는 서로 다르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물리적인 공격행위라는 점은 정확하게 똑같다.
문제는 그 폭력의 횟수가 점차 증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검찰청 ‘2017 범죄분석’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일어난 강력 범죄 건수는 28만4천852건이었다. 이것을 하루씩 계산해 보면 매일 전국에서 하루 780건의 강력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그 중에서도 여성에 대한 성폭력,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사이버 폭력이 많아 지고 있음을 쉽게 발견한다.
서울시 여성긴급전화 통계에 따르면 전체 상담 중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 성 폭력, 데이트 폭력 상담 비중은 매년 증가했는데, 2010년 1만623건에서 2017 년 1만8천142건으로 70.8%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폭력이 만연되어지고 있고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가정 폭력이다. 가정 폭력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울타리를 허무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그 횟수와 폭력의 정도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근거로 서울시 통계자료에 따르면 가정 폭력 경찰 신고/출동 횟수가 2010 년 1천726건에서 2016년에는 7천700건으로 증가했다. 보통 가정 폭력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신고를 꺼리는 것을 감안한다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왜 이렇게 폭력의 횟수 많아지고 정도가 심해지고 있을까?
첫째, 폭력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일하다. 보통 우리는 가정 폭력이라고 생각이 들면 남자인 남편이 여성인 아내를 폭행하는 것으로 흔히 생각한다. 그 정도가 가정 폭력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법에서 말하는 가정 폭력을 살펴보면 가정 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가정구성원 사이의 신체적•정신적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로 협박, 존속협박, 강간, 추행, 존속 폭행, 명예훼손, 모욕 등 다양한 범위를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자녀교육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손찌검도 충분히 가정 폭력이 된다. 우리 사회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유교사상으로 인해 전통적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 속에서 지내왔다. 그러다보니 사회 시스템이 남성 중심적으로 맞춰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은 그동안 남성 가정 폭력의 해결책인 마냥 우리 이데올로기 안에서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보통 가정 폭력은 남성 가해자가 많은데, 이런 폭력 행위를 단순 부부싸움으로 치부하고 결국 위 속담처럼 참고 넘겨야 하는 것으로 사회에 프레임화 되었다. 다시 말해, 그저 시간이 지나면 풀릴만한 행위로 용인되어 왔다. 하지만 사회가 고도화 되고 여권신장이 이뤄진 이때는 과거에 묵인되어 왔던 가정 폭력이 사실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처럼 인식의 변화가 더욱 일어나야 한다. 이유는 가정 폭력은 단지 부부싸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세대를 넘어 반복되어지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즉, 자녀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또한 폭력에 대한 안일한 인식은 실제 폭력을 당하고 있지만 정작 당하는 본인 자신은 이것이 폭력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자기부정까지 만들어낸다. 결국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것처럼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만들어 결국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둘째, 폭력이 심해지는 이유는 부정적인 미디어의 영향 때문이다. 즉 미디어가 폭력에 대해 우리에게 왜곡된 프레임을 주입시킨다. 예를 들어, 인기 높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잡아서 끌고 가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 어떤 이들은 그런 모습이 남자다움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크게 문제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라고 느끼곤 한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볼 때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는다고 한다. 엄연히 폭력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드라마를 끄고 우리 일상에서 저런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가 길거리를 걷다가 누군가 지나가는 여자의 손목을 잡고 자기 차에 억지로 태우려 했다면 우리는 바로 신고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드라마를 보면 전후사정을 이미 알고 드라마를 보기에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렇다. 우린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나 미디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폭력을 용인해 왔다. TV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 있는 유튜브나 1인 미디어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폭력을 용인했고 그 폭력이 결국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에 자리 잡았다.

더 나아가 동성애에 대한 미디어의 집요한 노출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성의식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폭력이 되었다. 앞서 가정 폭력에 대한 폭넓은 범주를 말했듯 폭력도 단지 사람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을 말하지 않는다. 동성에 대한 그릇되고 잘못된 관심과 환상을 심어주는 미디어야말로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폭력이 된다. 퀴어축제는 그들만의 소돔과 고모라를 쌓은 꼴이다. 문제는 보기 싫어도 미디어를 통해 퀴어축제를 접하게 될 수밖에 없는 우리와, 또한 근처를 우연하게 지나야 하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퀴어축제야말로 또 하나의 폭력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미디어를 통해 교묘하게 포장되어지는 동성애 행위는 아직 올바른 성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크게 미친다. 그들은 성차별을 중단하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성에 대한 폭력을 중단하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들에겐 퀴어축제야말로 폭력으로 다가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미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 또한 예수님의 귀한 존재들이고 복음을 전해야 할 하나님의 귀한 아들 딸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바라보듯 우리도 그들을 정죄할 이유가 없다. 그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기도하면 된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 폭력이 증가되는 이유는 폭력에 대한 무감각한 인식과 왜곡된 미디어의 노출로 일어난다.

오직 예수님이 답


그렇다면 폭력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는가?
분명 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단 하나다. 바로 예수님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쉬운 대답 아닌가.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것만이 유일한 길인 것을. 우리는 분명 정답을 알지만 문제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에게 문제의 원인이 있다. 분명 답은 나와 있다. 예수님이 하신 대로 그대로 따라가면 우리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다.
폭력에 대한 질문을 받고 여러 날을 말씀으로 묵상해왔다. 인간은 왜 하나님의 성품을 떠나 분노하고 폭력을 가할까? 왜 성폭력,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언어폭력, 사이버 폭력이 존재할까?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것은 교만함에서 시작된다. 즉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소위 ‘갑질’이라는 언어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그 정도가 심해지면 타인을 소유하려 폭력을 행하게 된다. 낮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고 내가 맞다라는 고집과 아집이 있다 보니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내와 자녀를 마치 내 것인 마냥 소유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연인을 내가 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절대 이 모두는 소유의 대상이 아닌 섬기는 대상임에도 우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철저하게 왜곡했다.

반면 주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섬기셨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스스로 세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고, 제자들을 대하실 때도 발을 닦아주며 제자들을 섬기셨다. 어린 아이와 과부를 늘 측은히 여기셨고 늘 약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렇다고 주님은 세상의 약자들만 함께한 것이 아니었다. 백부장이나 삭개오처럼 세상에서 지위가 있고 부자였던 사람들도 측은히 여기사 그들과 함께했다. 주님 보시기에 모두 다 죄인이고 약자였기 때문이다. 즉 주님은 반쪽 사랑이 아닌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고 섬기셨다. 신만이 가능한 사랑법이셨다. 그 안에는 편견과 증오가 없으셨다. 그렇기에 조건 없이 모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다. 주님은 교만함이 아닌 섬김 그 자체셨다. 섬김이 있는 곳에는 폭력이 존재하지 못한다.

폭력이 나의 교만함으로 시작된다면 그 교만함을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매일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예배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말씀으로 성령님과 동행해야 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인 조용기 목사님의 주일 설교말씀을 듣다 보면 늘 빠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제는 성령님의 시대라는 키워드이다. 성령님의 시대가 중요한 이유는 우린 늘 실패 하는 존재이지만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고 도와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망할 필요 없다. 낙담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론은 명확해졌다. 세상이 폭력적으로 변해간다고 걱정과 탄식만 하지 말고 그런 폭력성에 노출된 우리의 이웃들에게 성령님을 알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교만함이 아닌 겸손이, 폭력이 아닌 섬김으로 우리의 사회는 변해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매우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깨닫는다.
폭력이 난무한 시대, 지금 한탄만 하지 말고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권혁중 (문화평론가)

프로피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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