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사회, 어떻게 할 것인가

폭력의 원인, 분노에 대한 이해와 성경적 대안

분노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존의 욕구와 관계되어 있어 그 반응이 포괄적이고 강력한 에너지를 포함하는 감정이다.
분노가 일어나면 관점이 분노의 대상에 집중되고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현실 평가 능력이 줄어들며 생리적으로는 교감신경계가 항진되어 호흡과 심장이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하며 소화기관은 허혈 상태에 들어간다. 이처럼 생각에 영향을 미쳐 그 영향이 깊고 생리적인 자동성을 포함하고 있어 반복을 통해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로 발전하기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모든 감정은 이를 지지하는 생각과 짝을 이루는데 분노의 감정 뒤에는 자신이 공격을 당했거나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짝으로 나타난다. 이 특성 때문에 분노 행동을 다룰 때 ‘피해의식’을 다루는 과정이 반드시 포함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 분노 행동으로 인해 이미 가해자가 된 사람의 내면에 피해의식이 숨어있을 거라는 착안을 하기는 쉽지 않다.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쉽게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일견 연결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피해의식을 중심으로 분노를 들여다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공평함”이다. 당한 것이 너무도 억울해서 ‘내가 왜 그 상황에서 이 말을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반복하며 자신을 바보처럼 느끼거나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이렇게 하고 말거야’라는 생각으로 공평을 꿈꾸기도 한다. 이렇게 반추되는 생각의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려는 또 다른 필요 때문에 대부분 밖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사그라지지만 이 반복되는 사고의 패턴이 단초가 되어 분노행동이 촉발되는 흐름을 만들게 된다.
이 때 생각 속에서 흐르는 내용을 살펴보면 “피해의식”과 함께 이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기를 열망하는 욕구가 생겨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보상에 대한 욕구”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복수심”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복수심 이 공평을 회복하는 “의에 대한 열망”에 뿌리를 두고 자라는 것이다. 분노 행 동의 행위자는 불공평했던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의도에 집중되어 있어서 자 신의 파괴적인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분노를 이해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 분노가 갖는 관계적인 역동이다. 반복되는 분노의 경험은 흔히 어린 시절의 학대적 양육을 배경으로 한다. 능동적 학대뿐 아니라 관계적인 결속(Attachment)을 공급해 주지 못하는 것 또한 수동적인 학대로 간주된다. 부모가 인격의 연결감을 제공해 주지 못한 채 돈이나 방종으로 보상하는 경우가 그 전형적인 예이며 지금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이런 형태의 학대에 너무도 익숙해 있다.
“해 달라는 것 다 해줬는데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어”라는 표현 속에서 불만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는 한 가지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수동적 학대는 계속될 것이다. 학대적 관계는 아이에게 존중 받지 못한 상처를 남기는 것뿐만 아니라 분노 행동을 유도하는 행동 방식을 습득하도록 유도한다. 힘을 가진 자가 자기 필요에 따라 폭력적으로 상대를 움직이는 편리한 관계 방식이다. 어린 시절 피해자의 입장에서 습득했던 이 관계 방식은 내가 힘을 가진 상태가 되면 언제든지 사용 할 수 있을 만큼 심리적으로 익숙해지게 된다.
청소년들이 강한 분노를 표현해서 관계적 우위를 점유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시도가 그 한 예이고 요즘 사회적으로 흔히 나타나는 갑을 관계에도 이 폭력의 활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힘의 갑을 관계는 항상 고정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따라 언제든지 갑을의 입장이 전환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힘을 활용해서 자신의 상처를 처리하려 하거나 관계적인 우위를 점하려는 모든 관계 방식들이 폭력의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 또한 그 본질에 힘의 역동을 담고 있어서 나의 욕구 충족을 위해 폭력이 사용되는 현장이 되기 쉽다.

분노가 폭력으로


분노의 감정이 폭력으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사회의 영향은 대단히 크게 작용한다. 우리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내가 욕구하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욕구를 통제하는데 유효한 여러 가지 문화적 코드를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문화코드가 사회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집단의 안녕 보다 개인의 욕구 충족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생각이 훨씬 설득력 있게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통이나 사회의 압력에 의해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반발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 아닐까 짐작한다.
어쨌든 지금 우리 사회는 제어장치를 잃어버린 채 폭력의 영향에 깊게 잠겨있다. 한 사람의 폭력적인 영향은 사회 속에 필연적으로 피해자를 만들고 피해자는 가해자를 탓하는 습관을 갖게 되어 또 다른 형태의 가해자가 된다. 이렇게 폭력의 악순환이 형성된 사회 속에는 상처의 영향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건너가며 증폭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틈 사이에는 정의라는 이름을 가진 복수심이 끼어있다.

사랑받는 존재


성경은 용서에 관한 책이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도 용서를 기반으로 한다. 용서를 적용할 때 폭력의 증폭 현상을 멈출 수 있다. 피해자가 가 해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하나님의 대안이다. 용서를 결정하는 것은 나를 상하게 한 상대에게 더 이상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때 이미 생긴 감정의 상처는 억울하지만 내가 처리해야 할 몫으로 남겨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 억울함 때문에 용서를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용서는 가해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다. 용서의 산을 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억울함의 골짜기에 들어서기 어렵다면 먼저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이 큰 힘이 된다.

분노라는 감정이 포괄적이듯 이를 다루는 방법도 포괄적이어야 할 필요 가 있다. 행동과 감정을 조율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과 분노 행동의 씨앗이 되는 상처를 처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깊게는 예방적인 해결책을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건강한 사회화는 양육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는 힘을 기르도록 양육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역량은 관계의 약자인 어린아이 시기에 한 인격으로 존중 받는 경험을 통해서 만 생겨난다. 타인을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는 결정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아니라 서로를 더 축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은 존중을 받아본 사람만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다. 자타를 함께 존중할 수 있는 인격의 힘을 갖게 되면 관계에서 상함을 입더라도 나의 복수로 상대가 경험할 아픔이 느껴져서 폭력의 분출이 자연스럽게 제어된다.

성경은 이 양육이 가능하도록 아비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 6:4)고 당부한다. 오히려 “자녀들아 부모를 노엽게 하지 말라” 해야 옳은 조언 일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존심에 상함을 입고 분노를 느끼며 살아간다. 다만 부모가 갖는 관계적 우위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상함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관계적인 확신이 인격의 상함에서 생겨나는 분노와 보복의 욕구를 절제하도록 돕는데 얼마나 큰 영적 자산이 될 수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준 (선교사)

예수전도단 상담학교 책임자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