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생각나는 사람-서서평 선교사, 이기풍 목사

한국의 사도 바울 이기풍 (목사, 1865~1942)

이기풍(李基豐) 목사는 한국 장로교 초대 목사 7인 중에 한 명으로 제주도 선 교사이다. 그는 여섯 살 때 사서오경을 줄줄 외웠고 열두 살에는 백일장에 나가 붓글씨를 써서 장원이 되는 등 동네에서 신동으로 불렸었다. 이 글공부가 기초가 되어 나중에 눈이 어둡게 된 길선주 목사(3.1독립선언 당시 33인 중의 한 분) 의 대필자로서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대서해주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돈 많은 사람, 높은 벼슬을 가진 사람들을 벌레보듯 싫어했다. 또한 성격은 괄괄하여 술은 물론이요, 박치기의 명수로 평양에서 이기풍 하면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였다. 어느 날인가는 평양 좌수 사의 거들먹거리는 행동과 거만한 행렬을 보고 울화가 치민 나머지 좌수사의 멱살을 잡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꼬박 석 달 간을 형틀을 쓰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885년 이후 한국에 선교사들이 하나 둘 입국해 복음을 전했다. 이기풍은 우연히 장터를 지나다 코 큰 외국인이 사람들을 향해 서툰 조선말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믿으세요”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가뜩이나 나쁜 서양 사람들이 순진한 조선 인들을 꼬드겨서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킨다고 생각하던 차에 가만히 있을 이기풍이 아니었다.
이기풍은 가만히 지켜보는 척하다가 그 외국인을 향해 돌멩이 하나를 집어 던 졌다. 그 돌은 외국인의 턱을 명중시켜 그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진 외국인은 다름 아닌 사무엘 모펫(한국이름 마포삼열) 선교사였다.
청일전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 이기풍이 원산으로 피신해 있을 때였다. 우연히 길을 걷다 스왈른 선교사를 만나게 되고 지난번 자신이 돌을 던져 쓰러뜨린 선교사 생각이 나 이기풍은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마루에 누워 잠을 자는데 갑자기 방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 쓴 분이 나타났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너무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과거에 저질 렀던 죄들을 회개하고 헐레벌떡 찾아간 이가 스왈른 선교사였고 이후 모펫 선교사에게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모펫은 그 자리에서 이기풍을 부둥켜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후부터 이기풍의 생활은 전적으로 달라졌다. 동네 불한당이었던 그가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1898년부터는 매서인의 직분을 받아 함경남북도 일대를 누비며 전도했고, 황해도 일대에서 조사로도 활동했다.
이기풍은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고 대한 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1907년 처음 조직되면서 이기풍을 비롯한 졸업생 7인을 목사로 세웠다.
독노회에서는 7인의 목사 중 1명을 제주도에 선교사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당시 제주도는 같은 나라지만 말도 다르고 풍속도 완전히 달라 외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기풍 목사는 복음의 빚진 자로서 제주 선교를 결정하고 떠나게 된다.
1908년 봄, 큰 풍랑과 타고 간 배가 난파되는 등 모진 고난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제주도는 예상대로 이기풍 목사를 환영하지 않았다.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았을 뿐더러 천주교인 학살이 있었던 터라 모두 증오와 경계의 눈빛을 감추 지 않았다. 당연히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었다. 제주도에서의 삶은 이기풍 목사에 게는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참다못해 이기풍 목사는 평양에 있는 모펫 선교사에게 제주도를 떠날 것이라고 편지한다. 그러자 모펫 선교사에게 답장이 왔다.

“이기풍 목사,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제주도 선교가 그렇게 어렵다니 참으로 안 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 혹시 기억하고 있소? 당신이 예전에 내가 전도하고 있을 때 던진 돌로 인한 상처가 아직도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고 있소. 이것을 생각하고 이 상처가 없어질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
이 일을 계기로 이기풍 목사는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째 먹지 못하고 간신히 비바람만 피해 잠을 자던 이기풍 목사는 결국 해변가에 쓰러지고 만다. 다행히 한 해녀가 지나가다 그를 발견해 겨우 목숨을 구할 수있었다. 서서히 몸을 회복한 이기풍 목사는 필사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 해녀는 복음을 받아들인다.


이렇듯 제주도에서의 삶은 이기풍 목사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조랑말을 타고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전도했다. 또한 항상 바지저 고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밭농사하는 남자들을 도와주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했고, 자신은 굶을지언정 가난한 사람들과 천대받는 사람 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이기풍 목사가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섬기니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 둘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집에는 아침에는 거지떼로 득실거리고,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성안교회를 비롯하여 금성, 삼양, 성읍, 조춘, 모슬포, 한 림, 용수, 협제, 내도, 세화 등 30여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1918년 광주에 있는 북문안교회 초대 목사로의 부임을 시작으로 1923년에는 전남 순천교회, 1924년에는 고흥교회의 목사로 전임되었다. 그러다 다시 1927년 제주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재차 부임했고 1931년 전남 벌교교회로, 1934년에는 칠십 노구의 몸으로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산간벽지인 여수군 남면 우학리라는 작은 섬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1938년 일제는 그에게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령을 내렸다. 젊은 사람도 견디기 힘든 고문을 일흔이 넘은 나이에 당해야했던 이기풍 목사는 광주 형무소로 압송되기 전에 그만 쓰러졌다. 다행히 병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미 그의 몸은 회복이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1942년 6월 20일 그가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했던 우학리교회에서 주님 의 부르심을 받았다.
자기 주먹만 믿고 평양 제1의 깡패로 살던 한 사람이 복음을 만나 예수 그리 스도의 증인이 되었다. 참된 증인의 삶을 보여주며 한국교회에 본이 됐고 순교자로서 후대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남겨준 이기풍 목사, 여름의 길목에서 그의 뜨거웠던 삶을 반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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