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생각나는 사람-서서평 선교사, 이기풍 목사

스스로 ‘조선인’이 되었던 서서평(선교사,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 1880~1934)

의료, 교육, 복지, 계몽운동에 선두주자로 앞장서서 조선과 조선인을 죽기까지 섬겼던 서서평 선교사

1934년 7월 7월 광주 오웬기념각에서 양림 뒷동산까지 인산인해를 이루며 통곡의 소리가 광주시를 뒤덮었다. 장례식 행렬에는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할 것 없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 심지어 일본인들까지 장례식 예복을 입 고 따랐다. 하얀 소복을 입은 이일학교 제자들이 운구를 맡았고, 그 뒤에는 13 명의 양딸과 한 명의 양아들, 수백명의 거지, 한센환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어 머니”를 외치며 목 놓아 우는 소리에 조객들은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 장례식은 애초 교회장으로 치를 계획이었으나 지역 유지들을 비롯한 비기독교 인들의 주장에 의해 12일 동안 광주 최초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광주 시내를 온통 눈물 바다로 덮어 버렸던 이 장례식을 모두 마친 후 그가 남긴 것을 보니 덮고 있던 담요 반 조각, 일주 일 품값에 해당하는 돈 7전과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다. 이는 그가 어떤 삶을 살 았는가를 입증해 주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 품에 안긴 이틀 후인 1934년 6월 28일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자모 서서평양 장서’라는 제목과 “생전에 ‘재생한 예수’의 명칭, 모범할 근면 력행의 일생”, “이국 분투 22년”이라는 부제로 그의 죽음을 사회면 기사로 특필했다. 바로 22년 동안 조선인으로 살며 조선의 가장 아프고 소외된 자들을 끌어안고 저들의 길을 열어주었던 독일계 미국인 간호사 서서평 선교사의 이야기다.

독일에서 생후 1 세 때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의 손에 키워지다 9세 때 할머니의 죽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어머니를 찾아 미국땅을 밟고, 간호사 공부를 한 후 친어머니의 절연선언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택했던 그는 뉴욕의 성서교사훈련학교(현 뉴욕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쳤다. 이후 조선 제중원에서 간호전문 선교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접한 후 낯설고 물설은 조선 땅을 밟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31세(1912년 2월 20일), 미혼이었다.
그가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진료와 전도여행을 나 서면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270km 이상 거리를 돌았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모든 짐을 머리에 이고 백릿길을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 교부에 보낸 편지 中)
이런 상황은 그가 윤락가로 팔려간 여성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며 그녀들을 적극적 으로 구해내게 했고, 집에서 쫓겨난 여인들과 과부들에게 집을 내주고 자립할 수 있는 일터와 공부의 길을 열어주게 했으며, 한센병으로 모두가 외면한 이들의 보호자, 저들의 오갈데 없는 자녀들의 어머니가 되게 했다. 그래서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 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 당시 서서평의 월급은 학교운영을 위해 내놓았다)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치고,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다(결국 온갖 일제의 방해에도 그의 노력의 열매로 결 국 한국은 1949년 6월 ICN 정회원이 됨). 그리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한센환우의 자녀들을 자신을 비롯하여 주위 선교사들로 하여금 적극 입양하도록 도왔다.


또한 1933년에는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150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모아 한센환자 대행진을 시작, 조선에서의 최초의 인권운동을 주도했다. 11일이나 걸 려 서울 총독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 행진에 500여 명이 함께 했고, 7시간만에 총독이 면담을 허락, 소록도에 나환자 갱생원(요양원과 병원 등) 시설을 세우는 쾌거를 이뤘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한센환자를 보면 돌을 던지거나 피해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그들을 집에 들여 먹이고 새 옷을 입혔고, 고아들을 돌봤으며 자신은 비록 영양실 조로 중병이 걸렸음에도 35명 과부의 생활비까지 부담했다.
그의 선행에 영향을 받아 전라도 지역에는 많은 사회복지기관들이 생겨났다. 윤치 호는 고아원 시설인 ‘목포공생원’을, 이일학교 졸업생인 김화남은 늙고 의지할 곳 없는 여성교역자들을 위한 이일성노원(전남성노원의 전신)을, 정신 폐질환자를 위한 ‘사랑의 집(은성원의 전신)’도 이일학교 출신 홍승애 씨가 세웠다. 뿐만 아니라 애양원 설립도 서서평 선교사가 적극 나섰던 일이었다. 또한 광주 최초 여전도회를 만들어 성미운동을 전개했으며, 노방전도 주일학교에도 관심을 쏟아 확장주일학교를 열었고 이것이 활발히 진행돼 전국으로 퍼지게 돼 마침내 1922년 한국주일학교연 합회의 창립에까지 이르렀다.


서서평 선교사, 그는 22년간 조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병든 환센환자와 고 아, 과부들을 섬기며 초기 호남 사회복지의 기초를 닦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 였다. 또한 그는 조선인과 같이 된장국을 먹고 검정고무신 신고 함께 자며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주었다. 그는 배고픈 사람이 홀로 일할 수 있고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는 때까지 저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에 시달리면서도 저들을 품었던 그의 죽기까지 섬겼던 삶은 너무나 예수님과 닮아 있다. 민족과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서서평 선교사의 삶을 돌아보는 6월의 시간들이 되기를….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