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삶은 아름답습니다”

사랑과 고난의 시작

학창시절 선생님과 제자로 처음 만나 사랑을 꽃피워 결혼한 남편 김실 작가와 이영휘 원장(좌).

이영휘 원장은 경기도 양주의 회암리라는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은 지금은 옥정신도시로 개발돼 아파트 숲으로 변모했다. 그녀는 미션스쿨을 다녔지만 신앙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된다.
“새로 영어 선생님이 부임하는 날이었어요. 남자 선생님 한 분이 들어오셨어요.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물어보고는 교과서를 한 번 펼쳐보더니 칠판에 교과서 내용을 줄줄이 그대로 적어 내려가면서 수업을 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지요. 그 선생님이 미래에 제 남편이 될 줄 그때는 꿈에도 몰랐습니다.(웃음) 5년간 연애를 했지만 선생님은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어요. ‘선생님, 왜 결혼 안 하세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보통 분이 아니시라며 괜히 데려가서 고생시킬 수 없어서 평생 혼자 모시고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어머니, 제가 모실게요’라고 말했어요.”
시어머니에게 처음 인사를 간 날, 그녀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시어머니는 이 원장에게 교회에 다니는 지를 제일 먼저 물었다. 그녀가 신앙이 아직 없다고 말하자 시어머니는 결혼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제가 그 자리에서 바로 ‘그럼 믿을게요’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날 어머님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어머님을 따라가서 함께 참석했어요. 부흥회를 다 마치고 집에 와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눈부시도록 새하얀 세마포를 입으신 분이 저를 맞아주셨어요. 옆에 천사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는 저의 친구들도 그 자리에 함께 있어서 놀랐지요. 예수님이 저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날 인생에서 처음 주님을 만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후 2년 뒤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혼인을 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이 원장의 남편은 결혼 후 교사를 그만두고 가축을 길렀지만 돈이 되지 않았다. 영어교습소를 지어 과외 일을 하려고 했지만 과외 금지령이 떨어져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손해만 봤다. 이후 하는 일마다, 손대는 사업마다 뜻대로 되지 않고 망하기만 했다. 게다가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인감도장을 도용해 이 원장 부부 앞으로 5천 만원의 사채 빚을 내고 도주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지인에게 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사실 저희 친정은 동네에서 잘 사는 부잣집이었어요. 그래서 시집오기 전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땅 중에 가장 좋은 땅 2700평을 저에게 주셨어요. 땅 문서를 들고 남편에게 갔는데 남편은 당장 돌려드리라고 했어요. 당시 남편이 구입한 땅 700평이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너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하겠느냐’며 큰소리를 쳤지요. 그래서 땅문서를 아버지께 돌려드렸어요.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도 제가 결혼하는 것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어요.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예전에 아버지께 돌려드린 땅이 잠깐 생각나기도 했지요. 그때부터 저는 빚을 갚기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 결혼 전까지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았던 그녀는 동평화시장, 청평화시장, 남대문시장 새벽 장사로 정신없이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머니와 언니가 했던 한복 짓는 일을 시작했다. 한복 명장 탄생의 시초였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한복 짓는 일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제가 결혼하기 몇 해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언니에게 한복 일을 배웠어요. 주변 환경은 몹시 암울했지만 한복을 만드는 일만큼은 너무 재미있었어요. 제가 만든 옷을 입혔을 때 보여지는 자태의 우아함에 매료됐지요. 언니가 냉정하고 독하게 저를 가르쳤어요. 덕분에 제가 다른 사람들이 몇 년 걸릴 기술을 저는 한 달 만에 터득했어요.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 덕분이었지요.”
재정적 고난은 그녀의 인생에서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결혼 전부터 까다로운 시어머니인 줄은 각오를 하고 결혼을 했지만 이 원장이 들려준 시집살이의 괴로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였다.
“남편은 실패한 사업을 정리하고 대기업에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어요. 서울시청 부근에 본사가 있었는데 양주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해 40분을 걸어 나가야 차를 탈 수 있었고 퇴근해서 돌아오면 밤 10시였지요. 시어머니는 남편이 집에 없을 때만 저를 들들 볶기 시작하셨어요. 시집오기 전, 땅을 아버지께 돌려드린 걸 아시고 난 후부터는 그 땅만 있으면 본인 아들이 새벽에 나가서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며 저를 더 괴롭히기 시작하셨어요. 매일 같이 우리 부부 방에 오셔서 가운데서 잠을 주무셨고 또 차려드린 밥상을 하루에 다섯 번이나 엎으셨어요. 매일 밥상을 엎으시니 나중에는 그릇이 다 깨져 사용할 그릇이 없어서 깨지지 않는 스테인리스 그릇을 사다가 밥을 차려드렸어요. 또 제가 입는 옷가지를 지저분하다며 가져다가 태우셨고 낙엽을 태운다는 명목으로 불을 놓다가 옆집의 오토바이, 트럭 등을 태워서 변상해준 일도 다반사였어요. 어머님 때문에 힘들었던 일을 남편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어요. 속으로만 울었지요. 남편이 속상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저는 더 마음이 아팠거든요. 제가 모시겠다고 말했는데 자존심 때문에라도 더 말하지 못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시어머니를 17년 동안 모셨다. 오직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새벽에 기도하고 밤에 교회가서 기도했다. 기도하는 순간만이 그녀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위장병이 도지고 말았다. 아이를 낳았는데 밥을 먹자니 소화가 안 되고, 안 먹자니 모유를 먹일 수 없어서 속이 아파도 울며 밥을 먹었다. 게다가 가슴에 커다란 혹이 만져졌다. 돈이 없어 진단을 받을 수 없었던 그녀는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해 금식기도를 작정했다.
“죽으면 천국, 살면 주의 일이라는 각오로 오산리 기도원으로 갔어요. 우리 부부는 신혼여행을 가기 전 오산리 기도원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신혼부부가 왔다며 강사님이 쓰시는 방을 내어주시며 환대해주셨고 예배 때 특송도 불렀어요. 그 생각을 떠올리며 금식기도를 시작했는데 이틀째부터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사흘째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저에게 상추에 보리밥과 된장을 싸서 제 입에 넣어주셨어요. 꿈이었지만 지금도 그 맛과 향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배불리 먹여주셨고 아침에 잠에서 깼는데 몸이 날아갈 것같이 좋았어요. 가슴에 혹을 만져봤는데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저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결혼 후 집을 짓고 살던 터가 이상했다. 깨진 그릇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됐고 이 원장의 꿈에 온갖 뱀들이 자주 등장해 쫓아내다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 동네 사람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이 집터가 옛날에 고려장 터였다는 거예요. 옆에 있는 우물에서 사람 뼈가 많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언젠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과 함께 사역하셨던 시이모님이 저희 집에 방문하셨는데 집터가 너무 쎄다며 기도가 많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그 땅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온갖 영적 전쟁을 치렀어요. 오직 기도만이 살길이었지요.”
십수 년간 인내하며 기도했을 때 마침내 시어머니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착한 며느리를 구박했구나. 내가 잘못했다. 우리 며느리밖에 없다”는 고백을 듣게 된 것이다. 또 시누이에게서도 “그동안 내가 많이 미안했어”라는 사과를 받았다. 그 말을 듣고 이영휘 원장은 모든 마음의 앙금과 한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도 어머님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어요. 어려운 살림에 돌아가실 때까지 병치레 한 번 없이 건강하게 지내신 것도 감사했어요. 남편을 대학까지 공부시키신 것도요. 나중에는 밥상을 엎던 어머님께서 제가 일하고 늦게 돌아오면 밥을 차려주시기도 하셨어요.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는 분이세요.”

부부가 회암리 산골에서 돼지를 키우고 있을 때였다. 시골마을에 한 유명인이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찾아왔다. 소설 <인간시장>을 쓴 김홍신 작가였다. 이 원장의 남편과 김 작가는 막역한 친구사이였고 20년 만에 재회했다. 남편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김홍신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영혼을 갉아먹는 고행의 길인데 그 길에 들어서려고 해? 하지만 그래도 글쟁이가 되고 싶다면 열심히 해봐.”
김홍신 작가의 조언에 도전을 받고 원고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소설을 채워나갔던 이 원장의 남편은 소설가가 됐다. 김실 작가. 그는 30년 동안 써온 2700쪽의 대하소설 <신의 눈물>을 지난해 탈고해 출간했다. 대하소설 <불곰>과 122편의 중단편과 꽁트를 썼다. 성극집 <나는부활이요 생명이니>, <안악골 호랑이 김익두>, <부르터스 너까지도>, <돌아온 탕자>를 써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남편은 소설가로, 아내는 수필가로 부창부수(夫唱婦隨)인 부부다.

<글=김선홍 기자, 사진=스튜디오탁스 탁영한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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