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고통, 조울증

올바른 치유의 길을 찾아서

현시점에서 우리는 치유의 개념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는 병은 수술을 하든 약을 먹든 어떻게든 손을 쓸 수가 있고, 그 과정과 결과를 지켜볼 수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과적 질환은 환자의 특별한 이상행동이 아니면 알 수 없다. 약물도 쓰고 기도도 하지만 단번에 낫는 경우는 드물다. 그 병이 호전될 수는 있지만 결코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목사의 안수기도로 귀신이 떠나가고 금방 새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환자가 정신병적 환자가 아닌 일반인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삶의 신비를 단순한 문제로 축소시키고 손쉬운 응급 처방책을 제시해주는 설교가들을 볼 때 우리는 울적해집니다”라는 말로 우리가 울적해지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그의 책 (번역서: 영적발돋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역경 앞에서 타협과 회유를 일삼는 인간의 비 겁함과 역겨운 삶의 방식을 꼬집어 말한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현실에 자신을 열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또 우리가 스스로 고칠 수 있는 상처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 세계의 주인이며 따라서 삶의 모든 사건이 안전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또 그런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자신만의 디즈니랜드를 만들겠다는 환상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눈 멀고 귀 먼 것은 자신이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표지가 아닙니까? 이런 질문들이 단순한 미사여구의 차원을 넘어서서 다가오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힘이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지를 가장 깊숙한 자아를 통해 느끼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맡기는 마음


내게 상담의뢰를 해온 K의 형은 조울증 환자다. 20대 초반에 발병하여 40대에 들어섰으니 환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도 조울증에 대해 알만큼 아는 수준이 됐고, 이제는 면역이 되어 으레 그러려니 하지만 거의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조울증 증상으로 환자는 물론 가족 전체가 함께 열병을 앓는다. 그 때마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퇴원 시에는 전보다 더 두툼한 약봉지를 받아오게 된다.
K에게는 자신의 처자식 빼고는 혈육이라야 형 하나뿐이어서 형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최근에는 형을 자신의 집 근처에 방을 얻어 살게 하면서 수시로 돌봐주지만 형을 제대로 돌봐주기 위해서는 형을 집으로 들이든가 아니면 자신이 형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돌봐주어야만 형을 제대로 자립하게 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 역시 쉬운 결정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가족들이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형을 제대로 돌봐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항상 형 옆에 붙어 있어서 형의 필요를 채워주며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게 여겨 주변국 여인과 결혼까지 하여 따로 생활을 하게 했으나 짧은 결혼생활에서 오히려 스트레스만 가중돼 결국 지금은 혼자 살게 되었고, K는 이러한 형의 입장을 바라보며 동생으로서의 자신의 책임처럼 괴로워하고 있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형제애의 K 모습을 보며, 형에 대한 애정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가족이 형으로 인해 희생하고 어려워지는 일이 없도록 다른 길을 강구해보자는 말로 그를 돌려보냈으나 나 역시 제대로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무능력과 자책감이 들었다. 이런 경우를 만날 때마다 내가 목사로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그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지 모른다. 내 지식과 능력으로 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몰라 자괴감을 느끼며 무기력해질 때가 있지만, 한편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되어 겸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현병(schizophrenia)은 망상, 환각, 환청 등의 정신분열병이다. 그러나 또 다른 정신병적 영역에서 조울증이 있다.
“조울병(bipolar disorder)이란 바로 병적인 기분증가 상태(조증)와 병적인 우울 상태(우울증)가 일정한 기간을 주기로 반복되어 일상생활의 영위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양 극단의 기분 기간이 있어서 ‘양극성 장애’라고 불리기도 합니다.”(인제대, 김원 교수)
의학적 부분이지만, 조현병이나 조울증의 경계에서 이 둘의 구분이 명확치 않은 분열정동성장애(Schizoaffective disorders)가 있다. 이러한 병적 요인들에 대해 최근에는 정신의학계에서 뇌과학 측면으로 풀어가지만 DNA에 의한 가족력이나 주변 환경변화에 따른 스트레스 등의 심리적 요소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는 모두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함부로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또한 목사의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없는 영적 세계 역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이 또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의사, 목사, 기도가 함께 가야


꽤 오래 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목회자를 위한 정신의학 세미나’를 주관해 온 적이 있었다. 이 세미나의 목적은 의사나 목사가 서로 모르는 영역들을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며 그 뜻을 공유하도록 하자는 것이었고, 지역의 많은 목회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사실 목회자들은 의학적인 전문분야는 잘 알 수 없기에 의사들에게 겸손히 배울 필요가 있었고, 의사들은 자신의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을 인정하고 영적인 부분에서 목사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서로에게 올바른 처사이다.
그러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정신병에 관한 부분을 신앙이 없는 의사들은 과학적 토대 위에서만 풀어가려 했고, 의학 지식이 없는 목사들은 귀신 논리로만 풀어가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선의 아집들로 말미암아 의사는 환자가 신앙적 문제로 목사의 기도를 받는 것에 부정적 관점을 말하였고, 목사는 ‘믿음으로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의사의 약물치료를 거부하게 한 것이다. 이 때 너무 아쉽고 화가 났던 것은 일부 한정된 경우지만, 의사나 목사나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소신만을 주장했지, 진정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답은 환자에게는 의사도 목사도 그리고 약물도 기도도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특별 은총도 있지만, 일반 은총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치유’였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과도한 비교경쟁의 삶 속에서 서로를 품어주기보다는 서로를 대적하는 대립구조의 패턴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정신병적 요소들에 의해 고통 받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유’를 말한다. 그러나 이 치유의 한계와 치유의 방법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는 건강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에게, 특히 정신병적 고통에 얽매여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건강한 관심’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자기만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정신병적 환자들에게 어떤 치유를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정신과를 제외한 일반 환자에게는 전적으로 의사의 전문성에 의뢰한다. 그러나 정신과에 속한 의료영역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기에 의사도 목사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
최근 의학계에서는 뇌과학의 발달로 앞으로는 거의 과학적 측면에서 정신병의 문제를 다루려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는 과학적 접근이나 수치의 잣대로 만 규정지어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영혼육(靈魂肉 살전 5:23)의 총체 적 관점에서 전인치유적 접근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참다운 치유는‘돌봄’


현시점에서 우리는 치유의 개념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는 병은 수술을 하든 약을 먹든 어떻게든 손을 쓸 수가 있고, 그 과정과 결과를 지켜볼 수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과적 질환은 환자의 특별한 이상행동이 아니면 알 수 없다. 약물도 쓰고 기도도 하지만 단번에 낫는 경우는 드물다. 그 병이 호전될 수는 있지만 결코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목사의 안수기도로 귀신이 떠나가고 금방 새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환자가 정신병적 환자가 아닌 일반인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정신병에 서는 귀신들림인지 아니면 정신분열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조울증의 경우 조증으로 업(up)되었을 때는 자신감과 힘이 넘치고 며칠씩 밤을 새우면서도 끄떡없이 열정적으로 들뜬 상태를 유지하는데, 이것을 귀신들린 힘이라고 생각하여 접근하면 오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치유(healing)는 돌봄(caring)이다. 특히 정신병적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누구를 완전히 고쳤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연약한 인간의 한 사람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웃의 필요를 채우며 돌보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치유와 돌봄은 함께 돌보는 자의 나눔(sharing) 으로 이어져야 한다. 누가 누구를 돌보는 관점에서라기보다 함께 이 시대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연약한 지체로서 나의 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공유하며 나눌 때 바로 거기에 인격적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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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남 (목사)

우림복지재단 대표이사 ·기독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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