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너와 함께 있으리라(36)| 안식일의 주인이 묻기를

심판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은 거침이 없었다. 천지 창조와 함께 시작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들고 오신 아들은 그 아버지의 크신 뜻을 권력의 도구로 만들어버린 ‘종교’ 지도자들의 옹벽을 뒤엎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그 아름다운 완성의 때가 마침내 이르렀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2~3).
그분의 놀라운 꿈이 모세에게 준 증거의 돌판에 새겨졌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
그것은 곧 완성될 장래 일의 ‘징조’이기도 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이것이 곧 처음이요 나중이며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의 ‘기본계획(master plan)’이고 일정표였다. 하나님은 그 ‘안식일’의 비밀을 모세에게 일러 주셨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출 31:13).
‘안식일’은 하나님의 큰 계획이고 꿈이며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영원한 언약이고 장래 일의 표징(標徵, sign)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끊으려는 사탄이 집중적으로 공격하려는 목표는 그 ‘안식일의 꿈’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완성의 날’에 무엇인가를 더 해야 한다고 미혹하는 것이 사탄의 계략이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31:15).
그러므로 안식일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대로 모든 성장의 과정을 통과하여 그분 앞에 서는 완성의 날이고 밀월의 날(honeymoon time)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크로노스의 ‘날’ 보다 카이로스적 ‘뜻’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을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출 31:16~17).

어느 것이 옳으냐?
그 아름다운 꿈을 ‘종교’로 만들어버린 자들이 안식일을 위협과 결박과 압제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질문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막 2:25).
그리고 다시 한 말씀을 더 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심기가 불편해진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관한 트집을 더 잡으려 할 때 예수께서는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거기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일어서라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서자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물으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그 물으심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려서 지우고 덧칠하려는 것이야말로 사탄의 계략에 동조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시며 손 마른 자에게 이르셨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어 자유롭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외면한 채 정치적 세력인 헤롯당과 공모해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하는 ‘사람의 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어떤 기도를 하셨으며 어떤 응답을 받으셨을까? 만일 열두 제자의 이름을 지명해 응답을 받았다면 그 응답은 잘못된 것이 된다. 그 열둘에 포함된 가룟의 유다가 예수를 팔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중에서 유능하고 훌륭한 자를 뽑으신 것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와 권력자가 아닌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운행하고 계시는지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택하신 열두 명의 신상을 살펴보면 베드로, 안드레 형제와 야고보, 요한 형제 등 어부가 네 명, 빌립과 나다나엘 등 농부가 두 명이고 예수와 같은 목수 출신으로 배 기술자였던 도마와 천대받던 세리 출신의 마태와 그의 형제 야고보가 있었다. 또 열심당에서 온 시몬과 그의 친구 다대오 그리고 가룟 사람 유다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가 보이는 한 산에 오르셨다.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
제자들은 많은 능력을 보여 주신 그분이 오랫동안 이방의 핍박과 압제 속에 살아오며 주저앉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어떻게 회복하실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분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한 그분이 갑자기 사람에 관한 일을 말씀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에 관해 말씀하셨던 것이다. 베드로의 기억을 받아 적으며 마가는 사자처럼 질주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는데 마태는 그분의 말씀에서 사람에 대한 관심을 읽고 있었다. 그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그분과 만나고 있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이미 엘가나와 그의 아내 한나에게서 ‘만군의 여호와’로 불리우신 후로 천년 동안 선지자들을 통해 ‘만군의 여호와’를 자처하시며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애절한 사랑을 접어두셨던 하나님이 마침내 그 아픔을 물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어부이고 농부이며, 목수이고 세리였던 제자들이 그 앞에 있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열심당 사람도 있었다. 또 여호수아 때 북쪽 땅을 나눠 받은 납달리와 스불론 출신도 있고, 안티오쿠스 Ⅳ세의 박해를 피해 도망쳐온 피난민의 자손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눅 1:51~52).
예수를 낳은 마리아도 그런 열망 때문에 목숨 걸고 주의 뜻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세상에 오신 예수의 말씀 속에 그런 전투적 격려사는 없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권세와 식량보다 그분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마태는 그분이 자신의 집에 오셨을 때 인용한 호세아서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그분은 그때의 말씀을 다시 빚어서 제자들에게 주셨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금단의 열매를 먹고 육신의 눈으로 더러운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 몸을 가리고 숨었으나 더 이상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서로 전가하며 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오셨다던 그분의 말씀이 마침내 바뀌게 된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뱀이 일러준 대로 선악을 자기가 판단하겠다는 것은 곧 심판자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그것 때문에 가인은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의 권한 위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몫을 지키기 위해 남을 밀치고 싸우며 살아온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그렇게 말씀해 주신 ‘팔복’이 곧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할 수 있는 여덟 개의 자격 요건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설명은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전혀 달랐다.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의 가르침과도 달랐다. 그렇다면 저분은 세상과 떨어져 사는 엣세네파인가 하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그분이 말씀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엣세네파는 바로 맛을 잃은 소금이었던 것이다. 그분은 다시 말씀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4~15).
그것은 곧 제자들에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작전 명령이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죄악과의 전쟁을 지휘하러 오신 그분은 마침내 놀라운 명령을 내리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4~45).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었다.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돌려 세우기 위해 끝날까지 애쓰시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먼저 사람을 심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서는 행위였다. 심판을 유보하고 계시는 동안 바울을 비롯한 많은 ‘원수’가 ‘형제’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마태는 ‘천국의 비밀’에 관한 그분의 설명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마 13:19).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신 그분은 갑자기 그 나라의 성립이 지금 ‘진행 중’인 것으로 표현을 하셨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마 13:23).
그뿐이 아니었다. 농부가 뿌린 좋은 씨와 원수가 덧뿌린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셨다. 또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나무가 되고, 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이 전부를 부풀게 한다고 말씀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며,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
천국에 입성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자격으로 ‘팔복’을 선언하시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신 그분은 한 율법사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그 ‘팔복’의 심사 기준을 요약해 주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분이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에 일어날 무서운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다음 또 놀라운 말씀을 남겨 놓았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 24:34).†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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