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너와 함께 있으리라(35)|복수의 칼과 말씀의 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해 놓은 네 개의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마가복음’으로 알려져 있다. AD 47년 바울과 바나바의 수행원으로(행 13:5) 그들의 선교 여행에 따라나섰던 마가는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버가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그 일 때문에 AD 50년 바울의 두 번째 선교 여행에 따라가지 못하게 된 마가는 외삼촌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로 간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행 15:39).
그러나 그 이후 마가의 행적에 대해서는 AD 62년경 사도 바울이 연금 상태에서 썼다는 골로새서에 등장하기까지 12년간 기록이 없다. 필자는 소설 <마르코스 요안네스>에서 그 마가를 무역업에 종사한 사업가로 설정했었다.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골 4:10~11).
당시 바울은 마가에게 뭔가 특별한 임무를 주어 골로새 교회로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마가에게 무엇을 부탁했던 것일까? 필자는 소설 <마르코스 요안네스>와 칼럼집 <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마가에게 그가 아버지처럼 따랐던 베드로를 로마로 모셔오도록 부탁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 하느니라”(벧전 5:13).
사도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추대한 로마 교회는 그의 모든 활동을 로마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바벨론’을 ‘로마’로 해석하여 ‘베드로 전서’가 AD 64년경 로마에서 쓴 것으로 해석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로마를 ‘바벨론’이라는 은어로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의 수신자를 보면 그 발신지가 바벨론임이 분명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 1:1~2).
이들 수신처는 모두 터키의 동북쪽에 있는 지역들이다. 바울이 주의 지시를 따라 에게해 서쪽의 마게도냐로 건너가 활동했으므로 베드로는 바벨론에 근거지를 두고 동북쪽 지역을 자신의 관할 교구로 삼았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AD 50년 외삼촌과 헤어져 바벨론을 방문한 마가가 베드로를 재촉해 마가복음을 받아썼다면 AD 70년경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기존 추정보다 20년이 단축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검을 주러 왔노라
어쨌든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마가복음’은 빨리 그 말씀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인지 그 문체며 진행 방식이 네 생물 중에 나오는 사자의 기세처럼 강력하고 신속하며 긴박감이 넘치고 있다. 마가복음은 처음부터 말라기의 말씀을 인용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말 3:1).
그리고 다시 이사야 선지자의 글도 끌어온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광야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준비하는 세례 요한은 아합의 시대에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 850명을 도륙한 선지자 엘리야처럼 군인의 모습이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막 1:6).
자료를 치밀하게 챙겼던 누가는 그 시기를 밝혀 놓았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눅 3:1~2).
AD 6년 유대 왕 아켈라오를 파면한 로마 제국은 코포니우스를 유대 총독으로 파견했고 다시 그 후임으로 얌비비우스를 보냈다. 또 AD 14년에는 루프스를 임명했고, 그 다음 그라투스를 거쳐 AD 26년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전임자 그라투스가 임명한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세례 요한이 전하는 말은 무서운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 1:7~8).
그것은 마치 큰 군대의 소리와도 같았다.
“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겔 1:24).
그리고 나사렛에서 온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그것은 곧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시 24:8) 곧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아들에게 임무를 부여하시는 자리였다. 그리고 곧 ‘전쟁’이 시작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 1:12~13).
간략하게 기록된 이 무서운 전쟁을 마태는 좀 더 상세하게 기록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 4:3).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맞서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첫째는 아버지가 만드신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유월절과 칠칠절을 거쳐 초막절의 영광으로 가야 할 구원의 과정에서 중간 단계를 뛰어넘게 하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내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며 아버지의 질서와 맞서라는 것이었다. 아들은 그 최초의 전쟁을 모두 ‘말씀’의 검으로 이겼다.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신 32:41).
사탄과의 첫 전쟁을 이기신 아들은 크게 외쳤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그것은 곧 미혹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劍)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성경의 가장 큰 주제가 ‘사랑’인데도 불구하고 그 상당한 부분이 무서운 ‘전쟁’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사탄의 도전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쟁을 할 때마다 검과 칼이 등장하고, 그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삿 7:20, 개역한글).
성경에서 칼은 아담과 그의 아내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겠다며 금단의 열매를 먹고 육신의 안목에 의지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는데 그것을 안쓰럽게 여기신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가죽옷을 지어서 입혀주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재단하려면 ‘날’이 선 연장 ‘칼(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칼을 먼저 만들어 쓰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에덴동산에는 또 하나의 날붙이(刃物)가 있었는데 그것은 ‘검(劍)’이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火焰劍)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개역한글).

내가 긍휼을 원하고
칼(刀)은 물건을 자를 때 쓰는 날을 한쪽에만 세운 것이고, 검(劍)은 찌르거나 벨 때에 모두 쓰려고 양쪽에 날을 세운 것이다. 사람이 에덴에서 나와 살아갈 때 외날의 ‘칼(히, 마아켈렛)’은 공방에서 가죽을 벗기거나 재단할 때와 주방에서 채소를 깎고 썰 때에 사용했으며, 양날의 ‘검(히, 헤렙)’은 아벨 이후 가축을 제사용으로 잡을 때 사용되었고, 홍수 이후에는 짐승을 식용으로 도축할 때 썼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창 4:22, 개역한글).
주로 주방과 공방 또는 제단과 도축장에서 사용되던 칼과 검은 가인 이후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시대’가 되면서 살상용 무기로 전용되기 시작했다.
“나의 창상(創傷)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창 4:23, 개역한글).
그 이후로 주로 목축업에 종사하는 민족은 전쟁용 무기로 양날의 ‘검(劍)’을 많이 사용했고, 농사에 주력하던 민족은 자주 외날의 칼(刀)을 살상용 무기로 썼다. 또 처음에는 양날의 검이 제사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인지 검은 ‘권력투쟁’의 무기로 많이 사용되고, 칼은 공방과 주방 등 삶의 현장에서 주로 쓰던 것이므로 개인 또는 이웃 간의 갈등으로 생기는 싸움이나 복수의 도구로 많이 쓰였다.
한국의 경우에는 거의 1,800여 년간 제사장이 나라를 다스려 온 나라였기 때문에 제사용으로 ‘비파형 동검’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漢)의 무제 때부터 요하를 건너온 자들과 시비가 벌어지면서 전쟁 없이 살아온 조선에서는 주방과 공방에서 사용되던 외날의 칼(刀)이 방어용 무기로 사용되었고 삼국시대와 그 이후까지 이어졌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본국검(本國劍)이라면 외날의 칼을 의미한다.
칼을 검 대신 쓰는 전통은 삼국통일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와 고구려의 무사들에 의해 사무라이의 일본도(日本刀)로 이어졌다. 일본의 무사는 긴 칼 ‘우치가타나(打刀)’와 짧은 칼 ‘와키사시(脇差)’를 휴대하는데 그 중 ‘와키사시’를 할복(割腹)용이라고 미화하고 있으나 실은 상대방과 긴 칼로 겨루면서, 다른 손으로 짧은 칼을 뽑아 옆구리를 찌르는 암습(暗襲)용이며 ‘복수’의 의미가 강한 칼이다.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욜 3:10).
요엘 선지자가 ‘여호와의 날’을 예고하며 모든 민족은 전쟁을 준비하라고 한 것은 BC 835년이었다.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욜 3:14).
그로부터 243년 후에 에스겔은 그발 강변에서 네 생물의 날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군대의 소리와도 같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세상의 군대를 검열하기 위해 오시는 소리였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독수리의 눈으로 시대를 통찰한 요한도 그 때가 왔음을 확인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리고 아들은 그 일을 행하기 시작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막 1:24).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가 소리치자 그가 꾸짖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1:25).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그분이 귀신을 내쫓고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쳤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데리고 그분께로 데려왔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막 1:34).
그분은 네 사람의 친구가 데려온 중풍병자에게 이르셨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그 말을 듣고 서기관들이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하자 그분이 말씀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그리고 다시 중풍병자에게 이르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 2:11).
그러자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다. 그분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그것으로 증명한 것이었다.
전쟁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요엘이 전한 말을 다시 전했다.
“검(劍)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눅 22:36).†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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