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민 칼럼

고난 중에 깨달은 감사의 영성

감사의 영성은 영성의 최고봉이다. 예수님의 영성은 감사의 영성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기 전에 제자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감사를 통해 고통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것이다.


감사의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나의 고난의 경험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 혹독한 시련의 강을 건넜다.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고난이란 손님이 나의 삶을 문득 방문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그날 이후로 몇 년 동안, 흑암의 그늘처럼 내 삶 속에 드리웠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다. 인생의 무거운 짐이 나를 혹독하게 억눌렀다. 땅으로 꺼져 들어가는 줄 알았다. 모든 것을 다 상실했다는 절망감이 찾아왔다. 그토록 힘겹게 간직해 왔던 삶의 소중한 것들을 상실했다. 사람들의 오해를 받았다. 비난을 받았다. 머물던 곳을 떠나야 했다. 야곱이 야반도주를 하는 것처럼 떠나야 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떠나야 했다.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수치심이라는 괴물이 나를 괴롭혔다. 나를 신뢰해 준 분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밖에 나가면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침착한 체 했지만 마음은 파도처럼 요동쳤다. 조용한 분노와 고요한 절망감이 나의 깊은 상처 속에 스며들었다. 밤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를 조롱하는 사람들의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고통스런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며 반응해야 할지 몰라 고심했다. 그 때 하나님은 내게 고난의 사건을 감사로 반응하도록 도와주셨다. 그것은 특별한 은총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감사는 역설적 감사였다. 고난, 눈물, 내려감, 상처, 아픔, 상실, 어두움, 이별, 침체, 연약함, 그늘, 고립, 깨어짐 등과 같은 언어들이 나의 생각을 방문했다. 나는 한 주일에 한편씩 1년 동안 감사의 글을 썼다. 감사의 글을 쓰는 동안 역설적 감사가 나의 상한 감정을 치유했다. 하나님은 감사의 글을 통해 나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다. 감사의 글을 쓰면서 원 망과 억울함과 섭섭함으로 어두워졌던 영혼의 창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사의 영성은 영성의 최고봉이다. 예수님의 영성은 감사의 영성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기 전에 제자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감사를 통해 고통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셨다(요 6:11).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기 전에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셨다(요 11:41). 감사는 고통을 치유하고, 기적을 창조하는 은총의 도구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한다(살전 5:18). 감사할 수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쓴 서신 속에 감사를 자주 언급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예수님께 뿌리박은 영성의 최고봉은 감사다. 이 말씀의 마지막은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끝을 맺는다. 바울은 감사를 성령 충만의 열매임을 강조한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한 후에 그 열매로서 5장 20절에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권면한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감사하라고 권면한다. 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감사하라고 권면하는 것일까? 그것은 감사가 고난이 주는 상처를 치유하기 때문이다.

감사하면 깨닫게 되고, 깨달을 때 상처가 치유된다


고난 중에 감사하면 영의 눈이 열려 상처가 치유된다. 상처는 깨달음을 통해 치유된다. 깨닫는다는 것은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깨닫는다는 것은 고난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순간, 고난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넘어서서 고난을 고마워하게 된다. 고난을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다.
고난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난에서 면제된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다. 하지만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다(히 2:18). 인간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누구나 고난의 강을 건너야 한다. 고난은 상처를 준다. 고난은 아픔을 준다. 그런데 고난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은 고난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 하는 것이다.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 되면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감사하면 영의 눈이 열린다. 감사하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상처를 받게 되면 상처에 대한 아픔 때문에 상처를 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상처를 준 사람을 늘 생각하느라 그 사람의 노예가 된다. 상처를 받은 것도 고통스러운 데 상처를 준 사람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다.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과 복수심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든다. 우리의 눈이 어두워지면 상처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다. 상처는 아프지만 상처가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흔은 예수님의 영광이 되었다. 상처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 예수님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보혈이 인류의 죄를 정결케 하는 은총의 도구가 되었다. 예수님의 상처가 없으면 용서도 없고, 치유도 없다.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상처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고난 속에 담긴 유익을 보지 못한다.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비밀스런 축복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감사하면 영의 눈이 열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고난의 유익을 보게 된다.
내면의 치유는 깨달음을 통해 임한다. 깨달음이란 눈이 열리는 경험이다. 영의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고난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고난을 바라보게 된다. 또한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된다. 나는 고난 중에 감사하면서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나의 삶에 찾아온 고통스런 사건들을 성경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스런 사건에 성경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고통스런 사건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그 사건을 감사로 반응할 때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감사하면 상처를 진주로 만들 수 있다


나는 감사를 통해 고통스런 날들 동안 나를 붙잡고 계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다. 감사를 통해 과거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감사의 언어로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경험했다. 감사의 언어로 어두웠던 과거가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감사의 언어는 얼룩진 과거를 아름답게 색칠하는 물감이었다.
감사하면 상처가 치유될 뿐만 아니라 상처가 진주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감사는 상처를 치유할 뿐 아니라 상처를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어 준다. 감사는 수용능력이다. 감사하면 상처를 품게 된다. 상처를 품을 때 상처 속에 담긴 보석을 품게 된다. 우리는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 안다.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오면 상처가 생긴다. 조개가 그 상처를 품고 또 품는 과정에 서 진주가 만들어진다.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고난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만일 우리가 고통을 싫어하고, 상처를 저주스럽게 느낀다면 상처를 진주로 만들 수 없다. 상처가 없으면 진주도 없다. 상처의 크기가 진주의 크기를 결정한다. 상처를 싫어하고, 상처를 저주스럽게 여기는 것은 곧 진주를 싫어하고, 진주를 저주스럽게 여기는 것과 같다. 진주는 아주 귀하다. 그렇다면 진주를 만들어내는 상처도 귀하다. 결국 관점의 문제다. 상처를 어떻게 보느냐가 상처의 미래를 결정한다. 상처를 품는다는 것은 곧 진주를 품는다는 것과 같다. 상처 속에 는 앞으로 만들어질 진주가 담겨 있다. 마치 겨울 속에 봄이 담겨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겨울을 품을 때 또한 봄을 품는 것이다. 겨울 속에는 봄에 필 아름다운 꽃으로 충만해 있다. 겨울 속에서 봄을 보며, 겨울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복된 눈을 가진 사람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껴안아야 한다. 또한 상처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고통이 찾아오면 고통을 피해서는 안 된다. 고통은 도피 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직면함으로 해결된다. 물론 피할 수 있는 고통이 있다. 머리가 아프면 약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인생의 고통은 약으로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껴안음으로 해결된다. 감사는 정말 신비로운 능력이다. 감사하게 되면 저주 아래 있던 상처가 축복의 빛 아래로 옮겨가게 된다.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의 위대한 영적 부르심은, 우리의 상처를 저주의 그늘에서 꺼내어 축복의 빛 아래로 갖다 놓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때 상처는 치유가 되고, 그 상처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거룩한 도구가 된다.†

강준민 (목사)

LA 새생명비 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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