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 어떻게 볼 것인가

작성일2018-06-01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은 기독교의 내세관과는 분명히 다르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구원의 조건도 다를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 겪는 고통의 차원도 다르다. 기독교의 지옥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영원성에 있다. 불교의 지옥은 악업이 쌓은 만큼 있다가 그것이 소멸되면 다시 다른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한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이다.


지옥을 다룬 영화 흥행의 미스테리
한국인의 종교심리를 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죽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심판과 지옥을 묘사한 영화 한 편이 새해 벽두부터 한국 극장가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영화 「국가대표」(2009)와 「미녀는 괴로워」(2006)를 연출한 김용화 감독의 신작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이 개봉 한 달 열흘 만에 1천4백19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 모아 역대 흥행순위 3위에 올랐다. 2월 봄방학이 남아있고 뚜렷한 경쟁작이 없는 상황을 고려해볼 때 역대 흥행순위 2위에 올라있는 「국제시장」이 가지고 있는 1천4백26만 명의 기록을 뛰어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영화의 외형으로만 보자면 이 같은 흥행의 요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며 연재되었던 주호민 작가의 동명의 웹툰을 영화화하는 바람에 이미 젊은 세대로부터 주목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고, 하정우와 차태현 그리고 오달수 같은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것도 분명 흥행에 한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1987」의 경우 십대 여학생 2백만 명을 기본적으로 확보한다는 배우 강동원이 하정우와 함께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8백만 명대에 머무르고 있는 점을 생각할 때 「신과 함께-죄와 벌」이 흥행성공은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특히 영화의 내용이 불교의 죽음관에 입각한 심판과 그에 따른 지옥을 다룬다는 점에서 지금의 탈종교적인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임에 틀림없다. 통계청이 2015년에 실시한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종교인 인구비율이 전체 인구 가운데 43.9%로 종교가 없는 인구 56.1%보다 적었다. 통계청이 지금까지 발표한 결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1945년 해방이후 2005년까지 종교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해왔었다. 지금까지 종교별 인구의 차이는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 무종교인 보다 많은 다종교국가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종교인구를 연령별로 보자면 모든 연령대에서 평균 9%의 감소폭을 보였는데 특히 40대의 경우는 13.3%로 가장 많고 20대와 10대 순서로 감소폭이 컸다. 무종교인 비율의 경우 20대가 64.9%로 가장 많고 10대가 62.0%, 30대가 61.6%로 그 다음을 차지했다. 이것은 영화관을 자주 찾는 연령대일수록 무종교인이 많다는 것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종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성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신과 함께-죄와 벌」은 불교의 죽음관을 명확히 들어내고 있다. 화재현장에서 아이를 구하다 숨진 소방관 김자홍(차태현)이 49일 동안 7개의 지옥을 돌면서 7번의 심판을 무죄로 통과하여 환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스크린에 망자가 거쳐 가는 7개의 지옥에 대한 언급이 불교의 <불설수생경>(佛說壽生經)으로부터 인용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누가 봐도 이 영화가 불교의 죽음관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통계가 밝히는 종교인 현황을 볼 때 불교인구는 점점 줄어들어 2015년 주택총조사에서는 기독교(967만 명)보다 적은 761만여 명을 기록했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제시하는 지옥과 환생 같은 내용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불교인구의 두 배 가까운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 셈이다.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신과 함께-죄와 벌」을 보는 한국인의 종교심리

이 영화의 흥행 원인은 한국주택총조사의 수치가 말해주듯 종교문화의 변화로부터 찾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 세속적 사회에서 사람들은 죽음과 고통 같은 현실의 중요한 문제를 본인이 직접 종교에 귀의해서 해결하기 보다는 판타지 문화의 경험을 통해 해소 혹은 대리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판타지 장르는 현실세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이며 신성한 세계를 제시한다.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하는 다중접속게임(MMORPG)의 상당수는 신화적인 모티브를 이용한 판타지 장르이며, 최근 TV드라마로 인기를 모으는 ‘도깨비’에서 ‘화유기’에 이르기까지 이 또한 초현실적이며 종교적인 세계를 다루는 판타지 문화라 할 수 있다.

과거 종교전통의 영향 속에 있는 사람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삶의 사건들을 자신의 신앙 안에서 해석하곤 했다. 기독교인의 경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가 있다면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뜻(욥 23:10)으로 수용하거나, 현실 세계에서 목격하는 죄와 악의 문제를 하나님의 심
판(히 9:27)을 기대하는 신앙 가운데서 해석했었다. 만일 불교인이라면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 본 것처럼 지옥을 관장하는 신들의 심판 끝에 육도윤회(六道輪廻)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육도윤회란 살았을 때 저지른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에 따라 여섯 가지의 세상(천·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에 태어난다고 믿는 불교인의 생사관이다. 살아서 선업을 쌓은 사람들이 가는 세계가 바로 흔히 극락이라 부르는 천의 세계라면, 악업을 많이 저지른 사람들이 가는 가장 안 좋은 세계가 지옥인 셈이다.

그런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영화에서 설득당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던 것은 바로 귀인 자홍이 7개의 지옥 관문을 통과할 때 확인하게 되는 살아있는 정의로움이며, 또한 지옥마다 각종 죄를 저지른 악인들이 받는 고통에서 오는 심판의 정당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선한 사람은 오히려 불행하게 살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다면 분명 큰 위안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가난한 주인공 자홍이 저지른 불효와 이에 대한 어머니의 용서 등 효심을 자극하는 전통적 가치관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어찌 보면 1970, 80년대에 인기드라마였던 ‘전설의 고향’을 보는듯한 느낌도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효 사상에 있다.
마지막 재판인 천륜에 와서 자홍이 가난 때문에 농아였던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과 동생도 음독자살을 시도하려 했던 사실을 고백하게 된다. 천륜은 불효에 대한 재판과정으로 염라대왕이 직접 판결을 내리는 가장 중요한 재판으로 전개된다. 염라대왕(이정재)은 자홍이 어머니를 죽이려는 패륜적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변론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 하지만 자홍은 어머니에게 꿈속에서라도 용서를 빌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영화는 어머니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식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며 용서하는 모성애를 보여준다. 염라대왕이 이를 보며 던지는 말은 관 객들의 마음에 감동의 언어로 남아 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 중 일부만이 용기를 내어 진심으로 사과를 하며, 또 그 중 정말 극소수가 진심으로 용서를 한다.”

우리는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가 무려 4백8십만 명이 넘는 관객이 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관객들은 효도하지 못한 그들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다. 부모님을 향한 효의 가치관은 타락한 자식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조차도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인자로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다가 영화를 통해 살아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는 어떻게 지옥을 말할 것인가?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일찍이 단테가 그의 책 <신곡>(1304~1313)을 통해서 지옥의 세계를 묘사한 이후 이 책은 서양의 가톨릭 교인들로 하여금 죄를 각성하고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은 기독교의 내세관과는 분명히 다르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구원의 조건도 다를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 겪는 고통의 차원도 다르다 기독교의 지옥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영원성에 있다. 불교의 지옥은 악업이 쌓은 만큼 있다가 그것이 소멸되면 다시 다른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한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1740~1742) 기간 중 신명기 32장 35절을 가지고 엔필드지역에서 행한 설교에서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묘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함으로써 회개운동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란 제목의 이 설교로 인해 당시 청중들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울부짖으며 회개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가톨릭교회의 대중들이 단테의 <신곡>을 통해 지옥을 알았다면,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기억하는 지옥의 원형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 마가복음 9장 48~49절에서 사용된 지옥의 표현을 사용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멸망으로 가는 위태로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성경적 열심이 낳은 모습이었다.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어 하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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