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소녀들의 쓰라린 상처, 꼭 기억해달라고 [리뷰]

작성일2017-02-19

영화 ‘눈길’의 한 장면. 꽁꽁 얼어 얇게 눈이 쌓인 강 위에 선 영애(왼쪽)와 그의 친구 종분. 엣나인필름 제공

‘참 끝도 없이 간다. 봐라, 어디까지 갈라나. 엄마가 기다리랬는데…. 말도 못하고 와서 나를 찾을 건데…. 한참 찾을 건데….’

영문도 모른 채 만주행 기차에 오른 종분(김향기)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홀로 읊조린다. 엄마(장영남)가 돈 벌러 나간 사이, 허름한 방 안에서 남동생과 잠을 청하던 종분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 손에 이끌려 열차를 타게 됐다. 또래로 보이는 수십여명의 소녀들이 함께 붙잡혀왔다. 짐짝처럼 내팽개쳐진 이들은 한 데 뒤엉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 작은 열차 칸 안에서 동네친구 영애(김새론)를 만났다. 종분은 부잣집 딸 영애를 늘 부러워했었다. 가난에 찌들어 글 배울 기회조차 없던 자신과 달리 영애는 깔끔한 교복에 모직코트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 공부까지 잘해 1등을 도맡아했던 영애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영애는 “뭔가 잘못됐다”며 울부짖지만 돌아오는 건 일본군의 매질 뿐이다.

소녀들이 끌려간 곳은 만주 목단강 부근에 차려진 일본군 위안소. 차디찬 독방에 각각 내던져진 소녀들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낸다. 매일 학대가 이어진다. 일본군 한 명을 받고 나면 기력 없는 몸을 일으켜 바닥을 닦고 콘돔을 물에 씻어낸다. 온몸은 이미 피멍 투성이. 틈날 때마다 창밖 하늘을 바라본다.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애써 하루를 버텨낸다.

1944년 일제강점기 말 배경의 영화 ‘눈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아픔을 조명했다. 첫사랑 오빠와의 행복한 가정을 꿈꿨던 종분과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영애. 평범한 두 소녀의 우정을 통해 당시 참상을 비춘다. ‘똑똑똑’ 옆방 벽을 두드리는 것으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이들의 모습은 관객의 가슴을 욱신거리게 만든다.

영화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시선을 유지한다. 폭력적인 장면은 최대한 배제했다. 특히 직접적인 성 학대 장면이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겪은 아픔을 영화적 볼거리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이나정 감독의 의지였다. 미성년 배우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자극적인 장치 없이도 모자람 없이 메시지를 전달해낸 연출력이 빛났다.

‘눈길’은 2015년 KBS 1TV에서 2회에 걸쳐 방송된 단막극을 121분 분량으로 재편집해 영화화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는 할머니가 된 종분(김영옥)이 과거를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을 띤다. 종분은 평생 영애의 환영을 보며 살아가는데, 그런 종분에게 영애는 이런 당부를 남긴다. ‘다들 자기 힘든 것만 알지, 남의 상처 핥아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여기 이들, 네가 기억해야 돼 꼭. 알았지?’

종분과 영애를 연기한 배우 김향기와 김새론은 올해 한국나이로 18세가 됐다. 두 사람은 “모두가 알아야 할, 그리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이야기이기에 용기를 내어 출연을 결정했다. 피해자 할머니들께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3·1절 개봉.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