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속의 ‘액체괴물’

작성일2018-11-15

대전 길위의교회 주일학교에 나오는 10세 우영군이 액체괴물을 만지며 행복한 표정으로 놀고 있다.

요즘 아이들이 즐겨 갖고 노는 장난감 중 단연 으뜸인 것은 ‘액괴’입니다. 액괴는 ‘액체괴물’의 준말이지요. 액괴를 주무르는 재미는 성인에게도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들을 위한 액괴 카페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장난(감)은 어린아이들의 전유물이고 성인은 장난감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어른 세계의 불문율을 액괴가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액체괴물에는 우리 시대와 사람들의 무의식이 물컹거리고 있습니다. 액체는 형태가 없는 무정형의 물질입니다. 일체의 인위적인 정치 형태를 부정했던 노자(老子)는 이상세계를 무정형의 세계로 이해하고 그것을 물(水)에 빗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덕경(道德經)에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은 상태(上善若水)라고 말합니다. 물은 자기 고유의 성질을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어떤 형태로든지 변형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은 대립, 갈등과 같은 폭력성과 반대되는 이미지를 갖습니다.

‘괴물’의 사전적 의미는 모양이나 생김새가 괴상한 물건을 말합니다. ‘괴상하다’는 말은 비정상성을 함의합니다. 이 비정상성은 정상성에 대한 반대 의미를 상정함으로써 정상성을 강화시킵니다. 인류는 눈 두 개와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 팔다리 각 두 개씩, 그리고 직립보행과 언어 사용 같은 것이 정형화된 인간의 모습이고 이 정형성이 곧 정상이라는 생각으로 세계를 지배해왔습니다. ‘괴물’은 인류의 이 오래된 생각의 방향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괴물은 인격화되어 무서운 것, 공포를 주는 생물이나 영혼, 밖으로부터 우리의 정상적인 일상을 파괴하는 악마 같은 존재로 환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다주던 이 ‘괴물’이란 말이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막연한 상상과 공포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던 중세의 도그마가 해체되고 합리적인 사유가 지배하는 근대에 진입하면서 모든 것이 과학적인 패러다임으로 재해석되고 물리적 세계로 환원된 것입니다. 정신분석은 괴물을 우리의 인식체계가 만들어낸, 우리와 다른 사물과 세계에 대한 환영에 불과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또 사회과학은 괴물을 한 집단이나 국가가 만들어낸 정치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무섭게 생각했던 세계와 사물들이 근대적인 학문과 사유에 의해 해체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더 이상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장난감 이름에 흔히 등장하는 이 괴물(Monster)들은 아이들의 친숙한 벗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처음 시작되는 공간은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어머니의 자궁은 따뜻한 물(양수)로 태아를 감싸안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물의 감촉은 사람의 생명이 처음 느끼는 질감입니다. 그 따뜻한 물의 질감의 관념적인 형태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물은 생명의 기원이며 평화의 원천입니다. 체온을 유지하고 상처 입지 않도록 온몸을 감싸고 보호하는 양수의 느낌, 그것이 이 우주에서 느끼는 첫 번째 질감이고 존재의 감각입니다. 무의식의 저류에서 마음껏 유영하는 상태, 그 평화의 감각이 자궁 밖으로 나오는 순간 큰 울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집니다.

기계화 시대, 금융자본주의 시대, 무한경쟁시대, 이 차가운 금속성의 시대에 사람의 존재가 데이터로 환원되어 매트릭스에 감금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할 것 같은 상태, 그 상태가 불러온 것이 바로 액괴의 감각입니다. 무정형의 물질을 손으로 주무르면 피부에 마찰을 일으키며 원형의 감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질퍽질퍽물컹물컹탱글탱글…, 이것은 이성의 빛으로 해석될 수 없는 생명의 감각이며 존재의 원시적 질감입니다.

괴물이라고 불리웠던 나와 다른 세계, 나와 다른 사물, 나와 다른 사람을 향해 경계를 넘어 질퍽거리며 힘차게 걸어가는 우리의 무의식이 액괴에 물컹거립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실은 세상이 물로 되어 있었다지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거대한 어둠과 깊음의, 우주 양수 속에 배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가 따뜻하게 감싸안은, 어머니 자궁으로 회귀하고 싶은 현대인의 무의식이 액괴에 물컹거립니다. 아니, 태초의 시간으로 회귀하려는 모든 인류의 무의식적 욕구가 손끝에서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액괴처럼 상처를 치유하고 분열을 잠재우는 평화의 질감과 본능으로 꿈틀거리는 것이지요. 신앙은 그래야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주무르는 신앙의 액괴 속에는 가끔 낚싯바늘이나 칼날 같이 날카로운 금속이 숨어있기도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대전 길위의교회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30782&code=23111413&sid1=mco

김선주 (목사)

대전 길위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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