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 화분

작성일2017-06-07

어느 날 또 다른 깨우침이 제게로 왔습니다. 내면화 되지 않은 말씀은 감동을 줄 수 없지만, 말씀을 내면화 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말씀을 무조건 암기하는 거였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해도, 그래서 그 말씀이 당장의 감동은 줄 수 없다 해도, 말씀을 암기하고 있을 때, 말씀은 삶의 상황과 부딪치며 비로소 내면화 될 수 있는 거였습니다.


햇볕이 잘 들어오는 제 방 베란다엔 조그만 화분이 네 개 있습니다. 장미, 율마, 로즈마리, 애플민트. 이 아이들은 몇 년 전부터 하나씩 하나씩 지인들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장미를 보면 마음이 몹시 안쓰럽습니다. 볼품도 없고 향기도 없어 오랫동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거든요. 이 아이들 중 가장 먼저 저희 집에 온 아이는 장미입니다. 서울여대 교정에 있는 교회에 강연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귀한 예배시간에 저도 잘 알지 못하는 말들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여대를 다녀온 후로 저는 주님말씀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꽤 많은 분량의 말씀을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벽면 한 쪽은 암송한 말씀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사물이 또렷이 보이기 전에 말씀부터 읽었습니다. 산길을 다닐 때도 말씀을 암송하며 걸었습니다.
그 후로 여러 교회에 강사로 초대 될 때마다 암송한 말씀이 있어 저는 저의 여백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암송하면 성경 없이도 말씀을 수시로 묵상할 수 있어 좋았지만, 제 안에 내면화 되지 않은 말씀은 아무리 조화롭게 이야기 해도 사람들에게 진정성이나 감동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말씀이 내면화 된다는 것은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가슴으로 깨닫는 말씀과 머리로 아는 말씀은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벅찬 가슴으로 외웠던 말씀들에 대한 실망감이 적지 않았습니다. 부질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의미를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말씀으로 사람들 앞에서 저의 신앙을 자랑했던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후회스럽기도 했습니다. 벽면가득 붙여놓았던 말씀들은 하나씩 둘씩 제 곁을 떠나갔습니다.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말씀만 잊지 않으려고 수시로 암송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다른 깨우침이 제게로 왔습니다. 내면화 되지 않은 말씀은 감동을 줄 수 없지만, 말씀을 내면화 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말씀을 무조건 암기하는 거였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해도, 그래서 그 말씀이 당장의 감동은 줄 수 없다 해도, 말씀을 암기하고 있을 때, 말씀은 삶의 상황과 부딪치며 비로소 내면화 될 수 있는 거였습니다.
기쁜 일을 만났거나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제 머릿속에 주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그냥 기쁜 일이 되었거나 그냥 슬픈 일이 될 수도 있었지만, 주님의 말씀이 조금은 제 머릿속에 있었기에, 기쁜 일을 통해 주님이 저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은 건지, 슬픈 일을 통해 주님이 저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은 건지, 어렴풋이나마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의 삶과 부딪치는 접점에서, 말씀은 내면화 되었고, 저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머물지 않고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의 참뜻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암송한다고 해서 말씀이 내면화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씀을 암송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말씀은 비로소 내면화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서울여대 강연을 잊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제 방에 있는 장미 화분은 서울여대 예배시간에 강연을 하고 나올 때 받은 것입니다. 처음엔 예쁜 장미였습니다. 제 방으로 데려와 물도 잘 주었고 꽃도 잘 피웠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장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애플민트가 제 방으로 온 뒤였던 것 같습니다. 워낙에 허브를 좋아하는 터라 애플민트만 애지중지했던 것 같습니다. 익숙해진 것들은 조금씩 버림받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들어가는 장미를 보며 다시 정성을 쏟았지만, 어느 날부터 장미가 또다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며칠씩 마감 원고에 쫓기다가 3~4일만 물을 주지 않아도 장미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엄살을 부렸습니다. 여러 날 동안 여행을 다녀왔을 때, 잎사귀가 온통 노랗게 변해버린 적도 있습니다. 짠한 마음이 들어 얼른 물을 주어도 잎사귀는 다시 살아나지 않고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산책하는 길에 버리려고 장미화분을 거실 한 쪽에 두었는데, 죽은 장미가지에서 연둣빛 싹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다시 방으로 들여와 정성껏 돌봤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장미에서 꽃봉오리가 다시 맺힐 때, 고마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후 장미는 다시 한 번 죽었다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장미는 저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겨울이면 햇볕의 움직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자리를 옮겨주고, 베란다가 추울 것 같아 따뜻한 제 방으로 옮겨주기도 했습니다. 비록 처음의 아름다운 자태는 잃었지만, 장미는 잘 자랐습니다. 저의 무관심에도 끝끝내 살아준 장미가 고마웠습니다. 장미 덕분에 다른 친구들까지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장미가 아니었다면 그 아이들도 충분한 햇볕과 물을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허물을 허물로 여기지 않으시고 바라봐주시는 이유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가시 돋친 앙상한 꽃대 위에서도 거듭거듭 새잎을 피워내고 꽃을 피워내는 장미를 바라보며,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했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저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이철환 (소설가)

작품으로는 430만 명의 독자들이 읽은 <연탄길 1,2,3>과 <행복한 고물상>과 <위로>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등 총 23권이 있다. 작가의 작품 중 총 10편의 글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고, 뮤지컬 연탄길 대본은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2000년부터 책 수익금으로 운영해 온 ‘연탄길 나눔터 기금’을 통해, 낮고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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