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고아는 울지 않는다(4회)

조부 이원근 장로님과 가족들은 황해도 해주 항구에 모여 잠시 고향땅을 바라보았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탈북 피란민의 모습처럼 우리 가족도 조부 이원근 장로를 선두로 거룩한 ‘출애굽 역사’를 시작했다. 아니 영국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서인도제도를 향해 떠난 것처럼, 이원근 장로님의 가족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생명을 건 항해를 선택했다. 한 가지 가슴 아픈 것은 가족 중 유일하게 고모가 동승하지 못한 점이다. 이미 북한에서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의 옷자락을 잡고 기도하다
가족들은 작은 배에 운명을 맡겼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선장은 가족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숨소리도 내면 안 됩니다. 만약 공산당원들에게 발각되면 우리는 모두 수용소에 끌려갑니다.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가족들은 비린내가 진동하는 생선 궤짝 밑에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갇혀 있었다. 낡은 통통배는 이원근 장로 가족들을 싣고 밤새 어두운 바다를 달렸다. 그리고 38도선을 넘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남쪽 나라에 발을 디뎠다. 그때가 1948년 6월이었다.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땅 서울. 대가족이 남쪽에 내려왔으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족이 먹을 식량도 없었다. 그 당시 월남한 기독교인들 중 남한에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락교회를 비롯한 북한에서 내려온 목사님들이 세운 교회를 찾았다. 우리 가족도 물어 물어 영락교회를 찾아갔다.

그 당시 한경직 목사님은 영락교회 마당에 월남한 교인들이 임시로 거처할 커다란 군용 천막을 여러 개 쳐놓게 지시하셔서 많은 월남가족들이 혜택을 입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정착할 곳을 마련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떠나곤 했다. 수개월 씩 천막에 머무는 사람도 있었다. 가족들은 약 한달 동안 영락교회 마당에 설치된 천막에 머물렀다. 가족들은 이곳에서 철저한 광야훈련을 받았다. 아무도 의지할 수 없었기에 오직 주의 옷자락을 잡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시련에 처할수록 신앙은 더욱 견고하게 연단되어 갔다.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다
나는 가끔 ‘고아는 울지 않는다’라는 예화를 들곤 한다. 미국 미시건주 성요셉보육원에 아주 포악한 고아 소년이 하나 있었다. 그는 걸핏하면 싸움을 일삼았고, 학교에서는 이미 퇴학을 당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했다. 어느 날 베레다 수녀가 이곳에 교사로 부임해왔다. 그녀는 날마다 소년을 꼭 껴안고 속삭였다.
“하나님은 너를 정말 사랑하신다. 화가 나고 억울할 때는 울면서 기도하라.
그러면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소년은 베레다 수녀의 말에 감동되어 모범 소년으로 변화되었다. 그는 피자를 만드는 기술을 익혔고, 피자 한 판을 11초에 반죽했다. 이 소년은 나중에 피자 체인점을 만들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 사람이 바로 도미노 피자를 만든 톰 모너건이다.

이것이 기도의 힘이다. 복음의 능력이다. 눈물의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인다. 크게 놀란 아이들은 부모를 보면 울음부터 터뜨린다. 울음은 가장 강력한 사랑의 표현이다. 울음을 받아줄 대상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고아는 울지 않는다. 영적 고아는 눈물이 없다. 고아는 아무리 울어도 관심을 가져줄 대상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울지 않는다.

그러나 이원근 장로님과 가족들은 눈물의 기도를 통해 암울한 현실을 축복으로 바꾸었다. 하나님은 이원근 장로 가족들의 눈물의 기도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조부는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 원효로에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었다. 이제 본격적인 서울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남영동교회를 세워 월남한 교인들을 돌보았다.


제주도에 교회를 세우다
당시 대한민국의 가장 큰 비극은 제주도의 4·3사건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도에 거주하는 350여 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함께 제주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땅’으로 변모했다.
제주도민의 10%에 해당하는 약 3만여 명이 학살을 당하는 초유의 참사가 발생했다. 제주도는 한반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수많은 교회가 공격을 당해 화염에 휩싸였다. 선교사나 목사는 공격의 표적이었다. 1949년 여름 어느 날 전라도 광주에 본부를 둔 미국 남장로교 타요한 선교사(미국명 : John Talmage)를 만나게 되었다.
“장로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제주도는 4·3폭동이 일어나서 교회 대부분이 불에 탔습니다. 감히 교회를 다시 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로님께서 제주도에 내려가서 무너진 교회를 좀 재건해 주십시오.”
정말 어려운 부탁이었다. 왜 하필 할아버지인가. 그 무질서와 혼돈의 땅에….
“제가요?”
“장로님께서는 평양의 교회 장로로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황해도 장연면 국가재건위원장도 지내셨지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서다가 옥고도 치르셨지요. 이제 장로님이 그 믿음과 경험을 토대로 무너진 교회를 다시 세워주세요.”
할아버지는 선교사의 권유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기로 했다. 결국 조사(助事)라는 직책을 갖고 제주도에 내려갔다. 목포에서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로 건너간 조부는 남원에 정착한 다음, 가장 먼저 불타버린 남원교회를 재건했다. 현재 이 교회는 제주도 남원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예장통합 남원교회)가 되었다.
조부는 이 교회에서 2년 6개월 동안 사역했다. 당시 기록한 당회록이 교회에 잘 보전되어 있고, 새벽을 깨우던 종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기간 중 남원중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셨다. 교회에서 8㎞ 떨어진 위미지역에 기도처를 세웠는데, 지금은 이곳이 위미교회가 되었다. 표선이란 곳에도 기도처를 세웠다. 이곳도 표선교회가 되었다.

이원근 장로는 가장 위험한 지역인 제주도에 파송되어 여러 교회를 건립했다. 어디 그뿐인가. 새로 세워진 교회마다 6·25전쟁으로 제주도까지 피신해 오신 목사님들을 담임목사로 청빙해 안정된 교회 모습을 갖추도록 해놓았다. 나는 이런 훌륭한 믿음의 조상을 둔 것에 대해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

이영훈 담임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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