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승우 장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

작성일2021-03-23

시인 유승우 인천대 명예교수가 지난 9일 경기도 부천 자택에서 자신의 작품이 새겨진 액자를 배경으로 서 있다. 부천=신석현 인턴기자

‘물에는 뼈가 없습니다. 굵은 뼈, 잔 뼈, 가시도 없으며, 척추도 관절도 없습니다. 심장을 보호할 갈비뼈도 없어서 맑은 마음이 다 드러나 보입니다. 뼈가 없어서 누구하고도 버티어 맞서지 않습니다. 뼈대를 세우며 힘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 마셔도 목에 걸리지 않고 그의 뱃속에 들어가 흐릅니다. 누구를 만나도 껴안고 하나가 됩니다. 뼈대 자랑을 하며 제 출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높은 곳 출신일수록 맑고, 더욱 빨리 몸을 낮춥니다. 뼈도 없는 것이 마침내 온 땅을 차지하고 푸르게 출렁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시인이자 인천대 명예교수인 유승우(82) 장로의 2010년 출간 시집 제목이기도 한 대표작 ‘물에는 뼈가 없습니다’의 전문이다. 행과 연의 구분 없이 물 흐르듯 하나의 문단으로 구성된 이 시에는 그의 평생이 녹아 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인 경기도 부천 소사제일교회 명예장로인 그는 1969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문예지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한양중학교 교사, 인천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거쳐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장과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유 장로는 1·4후퇴 때 유엔군 전투기의 기총 소사로 왼쪽 팔꿈치 아랫부분이 절단된 장애를 딛고 시를 써왔다.

국민일보 연중기획 갓플렉스 인터뷰를 위해 지난 9일 부천 자택에서 유 장로를 만났다. 유 장로는 코로나19 재난으로 더욱 위축된 청년들에게 “세상에서 고난을 겪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했다. 많은 고난을 겪고도 부드러운 성품에 물과 같은 시를 쓰는 그는 “고난을 겪고 이를 믿음으로 이겨낸 다음에야 일체가 하나님 은혜인 것을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39년 강원도 옛 춘성군 남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초등학교 5학년이던 50년 10월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지금도 끌려가던 어머니가 문 뒤에 숨어있던 내게 ‘어서 도망가라’고 보낸 간절한 눈짓이 기억납니다.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야말로 고아가 됐습니다. 고아라는 말은 외로운 아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이 외로움이 문학의 기본 요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문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문학소년이 됐습니다. 이듬해 1·4후퇴 당시 중공군이 마을을 지나갈 때 유엔군 전투기의 기총소사 공격이 있었고 그 탄환에 왼쪽 팔꿈치 아래가 부서졌습니다. 흔한 말로 외팔이가 됐습니다. 외팔이가 돼 빈 소매를 흔들며 미군 부대 빨랫비누를 얻어다 팔아서 학비를 마련했습니다. 국어교사를 꿈꾸며 대학에 진학해 박목월 선생님의 제자가 되기까지 정말 넘기 어려운 외로움과 설움을 견뎌야 했습니다.”

부인 신명자 권사 옆에서 ‘물에는 뼈가 없습니다’ 시집을 낭독하는 유승우 시인. 부천=신석현 인턴기자

유 장로는 경북 영덕 출신의 부인 신명자(80) 권사와 6년간의 펜팔 연애 끝에 67년 결혼했다. 구세군 출신에 성결교도였던 신 권사와 결혼하며 믿음 생활을 시작했다. 유 장로는 “장애가 있는 나를 온전히 받아준 아내의 별명은 ‘500원 아줌마’였다”며 “시장 길가에서 흔들며 파는 500원짜리 옷만 사다 입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신 권사의 열렬한 기도로 가족과 이웃이 고통을 극복하는 일을 자주 체험했다. 슬하의 자녀 4명을 모두 국어 교사로 키워낸 부부는 지금도 부천 중동역 인근 동네에서 함께 손잡고 산책하는 노부부로 유명하다. 유 장로는 “아내의 헌신적 사랑에 녹아버린 인생”이라고 말했다.

“믿음은 지식이나 지혜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지적으로 이해해서 믿음을 갖는 게 아니라 은혜를 체험해야 믿음의 싹이 가슴에서 돋아납니다. 지식이나 지혜는 나를 남 앞에 내세우기 위한 뼈대입니다. 나를 내세우는 뼈대로는 가문도 있고 권력도 있고 돈도 있습니다. 이것 중에 가장 딱딱한 것이 지식과 지혜입니다. 내 지식의 교만은 얼음과 같았으나 사랑의 봄바람에 쉬 녹았습니다. 아내의 헌신적 사랑으로 얼음이 녹아 물이 됐습니다. 물에는 뼈가 없습니다. 지식이 녹아 믿음이 되니까 얼음이 녹아 물이 된 것처럼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내가 가장 큰 죄인이고 내가 가장 못났으면서도 잘난 척했다는 죄책감에 부끄러웠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면 시를 씁니다. 시를 쓰면서 울고 다 쓴 시를 아내와 함께 읽으면서도 웁니다. 젊은이들에겐 인간(人間)이 되려면, 즉 ‘사람 사이’를 메우려면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천=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83633&code=23111674&sid1=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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