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바리새인과 마주하다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삽시다

우리는 더 이상 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안에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외식의 태도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닮고자 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진실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의 25년 전의 일이다. 나는 신병교육대를 지나서 강원도의 한 부대로 들어가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들이 다 통과해야 하는 군 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입대의 시기가 조금 좋지 못했던 것 같다. 이등병으로 시작한 군 생활이 아직 익숙해지기도 전에 그 부대에서 가장 힘든, 천리행군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달간 강원도의 산들을 타야하는 참으로 고되고 힘든 훈련이었다. 처음에는 악으로 깡으로 버텼지만 1주일 만에 낙오하고 말았고, 선임병이 나와 함께 뒤에 쳐져서 걷다가 금세 어두워진 산에서 바로 앞에 있는 절벽을 확인하지 못해서 둘 다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서 중대장과 구조팀이 수색을 했고, 발견된 후 엄청난 욕과 모욕을 당하며 산을 내려와야 했다. 무엇보다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발을 다쳤기에 걷기가 상당히 힘들었는데 중대장이라는 사람은 계속 욕을 하면서 내가 빨리 걷기 만을 재촉했다. 나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피가 흐르는 다리를 무시하고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거의 산에서 다 내려온 지점에 이르자 갑자기 자신에게 업히라고 했다. 물론 친절한 호의가 아니라 욕과 함께 진행된 강제적인 명령이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명령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업혔는데, 업힌 후에 바로 풀숲을 나오자마자 신문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고 군대의 높은 장교들이 나와서 보고를 받는 장소에 이르게 되었다. 중대장은 나를 어렵게 찾아서 절벽에서부터 이곳까지 헌신적으로 이등병을 업고 온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조금 전까지 나를 병신취급 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따뜻하고 배려 깊은 아버지의 얼굴로 나를 대했다. 나는 억울함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아주던 그 중대장을 그 순간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적 바리새인
세상에 빛이 있고 어두움이 있다. 옳음이 있고 틀림도 있다. 그렇게 분명하게 차이가 나면 사람들은 혼란스럽지 않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분별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무섭고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빛처럼 보이는 어두움이며, 옳음처럼 보이는 틀림이다. 그것은 분별하기가 어렵고 잘 확인하지 못하면 치명타를 입게 된다. 부족해 실수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속임수를 쓰게 되면 한 사람만이 아니라 민족과 나라 전체가 패망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아군과 적군이 아닌, 교묘하게 아군처럼 들어와 적군이 된 친일파와 간첩들이 그랬고 우리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것처럼 선동질을 하면서도 사리사욕만 채운 정치인들과 정권들이 그러했다. 아이들을 위한 음식과 물건이라면서 팔아 온 것들이 사실은 그들을 죽게 만들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해 주는 좋은 일처럼 진행해서 그들의 삶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와 경제의 수준을 넘어서 교회 안에도 있다. 성경은 그들을 영적인 바리새인이라고 부른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진 종파였고, 우리가 잘 알듯이 위대한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특히 바리새인들을 비판한 이유는 그들이 가진 열성 때문이 아니라, 외식 때문이었다. 헬라어로 ‘외식’이라는 단어는 신약에 총 25번 사용되는데 그 뜻은 ‘가면’이라는 말로서 자 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거짓되게 보이는 태도를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외식하는 전형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으로 가장 특징적인 것이 ‘과시’다. 과시는 자신이 가지 있고 실제 행하는 것보다 더 크게 자신을 포장하고 과장해서 보이는 것으로써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 받고 칭찬받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팔을 불며 구제했고(마 6:2), 회당과 큰 거리에서 소리 질러 기도했으며(마 6:5), 흉한 얼굴로 금식하는 것을 자랑했다(마 6:16). 결국 그들이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서 잃어버린 것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이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비판과 판단’을 많이 했다. 문제는 자신들이 더 심각한 수준 이면서도 다른 이들에 대한 비판과 판단을 혹독하게 하였고 그 결과 그런 비판과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신들을 스스로 우월한 존재로 드러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남의 눈에 있는 티만 볼 수 있을 뿐,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마 7:1~5, 눅 6:42).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영혼의 내면적 가치보다 밖으로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집중’했다. 외모와 형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바로 잡지 않고 형식적인 것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은 영적인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아주 작은 풀들의 십일조를 철저하게 강조하면서도 의와 인과 신을 버렸고(마 23:23) 그릇의 겉만 깨끗하게 하려고 할 뿐,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찼다(마 23:25). 결국 그들은 썩은 시체가 들어간 무덤에 하얀색 회칠만 된 모습으로(마 23:27) 사람들에게는 옳게 보였을지 모르나, 그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는 불법한 자가 되고 말았다(마 23:27).

이렇게 복음서에 나타나는 바리새인의 모습은 이후 신약시대를 넘어 오늘에 이르면서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 이력서에 기독교라는 타이틀만 적어 넣은 종교인의 모습이다. 나는 이들을 비난할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현실을 직시할 목적으로 이런 기독교 종교인이 모습을 몇 가지 적어보려고 한다.

종교인의 특징
첫째, 종교인의 모습은 예배가 형식화된다는 것이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말한 것처럼 주일 예배 한 번 빠지면 천국 가는 계단이 하나 사라질까봐 두려운 마음에 예배는 참석하지만 몸만 와 있을 뿐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없다. 예배시간이 다 지나서 준비되지 않은 복장과 모습으로 편한 의자에 앉아서 찬송도 기도도 마음을 담지 못하는 립싱크 수준의 종교인들이 너무 많다. 예배시간에 잠을 자고 스마트폰을 하고 심지어 연애까지 한다. 이것은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행동들이다. 형식만 있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예배는 구경이 아니라 참여이며, 내가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둘째, 종교인의 모습은 말씀이 변두리로 밀리다 못해서 무가치해진다는 것이다.
집에 성경책은 있고 스마트폰에 성경 앱은 깔아 놓았다. 좋은 말씀이라고 여기 저기 붙여 놓기도 하고 연초에 말씀 뽑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말씀을 읽지도 듣지도 마음에 새기지도 않는다. 삶의 모든 결정과 방향에서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 깨달은 말씀이라도 순종하지 않는다. 신학교를 다니는데도 말씀을 연구하지 않고, 기독교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면서도 말 씀과는 상관없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모들도 말씀으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하는데 학원 돌리기가 바쁘다.
그냥 하나 물어보자, 이 글을 무슨 요일에 읽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주 주일 예배를 참석했다면 주일 예배 설교가 무엇인지 답할 수 있는가? 내가 실험해 본 결과는 90% 이상이 주일 설교 제목조차 기억하지 않고 있었다. 인터넷과 유튜브 보기에는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도 하나님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데, 말씀이 없으니 종교인의 삶은 방황이요 거짓이요 죽음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종교인의 모습은 기도가 없다.
기도의 형식은 있지만 깊은 진짜 기도가 없다. 그래서 목사들은 기도하기보다 인터넷 설교를 짜깁기 하는 것을 좋아하고, 신학 생들은 신학 정보에만 의지한다. 성도들도 여기 저기 전화하고 인간적인 수단을 간 구할 뿐 정작 기도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기도해서 뭐해!” 기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 기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곧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 없다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라고만 할뿐이다. 기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의 능력과 기도의 체험이 없다. 기도의 신비와 기도의 깊이 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곧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넷째로, 종교인의 모습은 삶이 없다.
종교인은 머리만 있고 손과 발이 없는 기형 적인 형태가 되었다. 순종의 삶이 없기 때문이다. 축복만 받고 싶을 뿐 주님과 함께 고난 받기 싫어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삶이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빛과 소금이라는 글자와 문장만 있는 큐티와 설교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빛인데 밝음도 뜨거움도 없고 소금인데 아무런 맛이 안 나는 정도가 아니라 썩은 냄새가 차오른다. 그래서 참 이 단어를 쓰기 싫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교인의 모습은 썩은 누룩처럼 개인을 넘어서 가족과 공동체로 전염된다(눅 12:1).


예수님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더 이상 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안에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외식의 태도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닮고자 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진실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진 것처럼, 내가 살지도 않는 것을 사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애쓰지 말고 진실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 놓아야 한다. 목욕탕에 간 사람이 옷을 벗고 치료 받기를 바라는 사람이 자신의 증상을 진솔하게 말해야 하듯, 우리 스스로 자신에 대한 솔직한 반성문을 주님 앞에 내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 있다면 고치고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배우고 훈련을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고백이고 회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죄가 하나도 없는 의인이 아니다. 누구나 죄인이다. 다만 어떤 사람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죄인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죄인이다. 오직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사람만이 구원의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내가 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오래된 문구이기는 하지만, 나는 늘 “예수님이라면” 하고 잠시 멈추어 서서 점검하고 물어 본다. 내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예배드리시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이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대답 하시고 이 참혹한 순간에 어떻게 결정하셨을까? 물론 딱 떨어지는 답이 항상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 고민하고 주님 앞에 삶을 멈추어 기다리며 기도할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해답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길에 서는 것이다. 축복만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축복 받을 만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들이다. 그분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고, 그분이 돈을 쓰시듯 돈을 쓰고, 그 분이 결정하시는 것과 최대한 유사한 방식으로 결정할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 인으로 이 땅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힘과 의지로만 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성령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물어보는 순간에 우리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일 것이다.

올해 들어 한 청년과 네 달 가까이 상담을 했다. 교회의 중역을 맡고 계신 아버지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은 한 청년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형제 안에 들어있는 분노와 원망과 아픔은 아버지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리새인처럼 가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형제의 이야기를 눈물로 들어 주었고 아버지를 대신해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아버지가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바꿀 수 있다고 말이다. 아버지가 가짜이기 때문에 마음 아프다면 그분을 욕하는 것으로나, 이어서 가짜로 살아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그 형제의 아버지를 용서하는 편지를 한 장 썼다. 물론 그 긴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성령님께서 도와주셨다.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쓰고 싶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이 땅에 너무 많은 가짜가 있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부터, 그대부터 우리부터 시작해보자. 한 사람의 예수께서 세상을 바꾸셨듯이, 한 사람의 진짜 그리스도인이 가족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바꾸게 될 것이다. 제발 글만 읽고 그치지 말고 삶을 바꾸어 보자.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다.†

강산 (목사)

십자가 교회 , <나는 진짜인가? >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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