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복’은 무엇일까

복을 바라보는 관점–고난과 감사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물질과 환경에 따라 복을 받았다, 복을 받지 않았다라고 판단하기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는가 아닌가가 ‘복’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고난은 찾아오나 그 고난을 극적으로 변 화시키는 하나님을 목격하는가, 못하는가가 ‘복’의 기준이 된다.

우리는 보통 좋은 것을 받거나 좋은 환경이 열리면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준으로 실제 사람들은 필자를 향해 “복 받은 인생이다, 참 대단하다, 부럽다” 등등 찬사를 쏟아낸다. 최근에는 두 번째 책이 출판되었고, 이미 5월에 쓴 첫 책은 정부가 한해 대표도서를 뽑는 ‘세종도서’에 선정되는 영광까지 얻었다. 본업인 사업이 불경기임에도 꾸준히 성장하여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동시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겸임교수 직함도 가지고 있다. 또한, 경제평론가로 KBS, SBS CNBC, YTN 라디오, TBS 라디오 등등에 활동하면서 얼굴을 알아주시는 분들이 많아졌다. 젊은 나이에 기업 대표, 교수, 베스트셀러 저자, 방송인 등등 외면적으로 보면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살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부러울 것이 많아 보인다.

고난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시간
하지만, ‘복’의 정의가 위에서 말한 대로 단지 물질을 얻고 좋은 환경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필자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듣고는 도저히 복 받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군대에 막 입대했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운영했던 가구 공장은 폐업이 되었고 이후 가족들은 생활고를 겪었다. 아버지를 잃은 심리적인 고통을 치유하는데 3박 4일의 휴가는 너무나 짧았다. 가족들을 걱정하면서 그렇게 군 생활 2년 2개월을 보냈다.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턱없이 부족했고 항상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죄송스러웠다. 그렇게 첫 직장을 가지고 결혼 후 가진 첫 아이는 유산되었다.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과 또 다른 고통이었다. 고귀한 생명을 다시 잃어버렸다. 다시 가진 아이는 생후 60일쯤 신우신염과 그로 인한 패혈증으로 생사를 왔다 갔다 했다. 여덟 살이 된 지금도 초음파로 신장을 추적 관찰하고 있다(물론 현재 건강하다).
또한 저자는 2년 전 디스크 파열로 인해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었었다. MRI 판독상 수술을 해야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른쪽 다리가 힘이 풀리는 마비증세까지 왔으니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는 곧 경제력 상실로 이어져 가족 모두에게 큰 절망으로 다가왔다. 얼마 전에는 아이가 CT상 게실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항생제로 치료가 안 되면 장을 잘라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고통 속에 있었던 시간을 말하라면 셀 수도 없다.

이처럼 세상이 말하는 ‘복’의 기준으로 보면 전혀 복 받은 인생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모습만 보고 세상 사람들은 복을 받았다고 간주하지만 막상 이런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하면 “복 받았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 스스로 “나는 복을 받은 인생이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엄청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직도 왜 아버지를 빨리 데리고 가셨는지 이유는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결론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를 열심히 기도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들었고, 나에게도 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천국의 소망을 품게 만들었다. 또한,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청년의 때부터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의지하고 스스로 무엇이든 열심히 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이다.

임신 초 유산이라는 것을 통해 생명의 값어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어른으로서 지키고 보호해야 할 생명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았다. 또한, 아이가 신우신염과 패혈증으로 아파할 때 주님의 분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기도해야 할 대상이 내 자식이 아니라 이 어린이 병동에 입원한 모든 아이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부끄럽게도 그 이후 너무 늦게 기부라는 것을 시작했다. 그렇게 기도 후 기적처럼 회복되어 지금은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저자의 디스크 파열로 인한 오른쪽 다리 마비도 어떠한가? 한 달을 누워 지내며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기도하고, 분명 낫는다는 생각으로 기도했을 때 주님은 나의 목소리를 들어 주셨다. 수술 없이 마비가 풀렸고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치료가 되었다. 그렇게 믿음은 더더욱 굳건해져 갔다.

최근에 아이가 배가 아파 찍은 CT에서 게실염이고 장을 절제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금요일 밤에 응급으로 입원하고 각종 검사를 위해서 2일을 금식한 주일 아침, 교회 식구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직후였다. 갑자기 다른 의사 선생님이 병실에 오더니 한 마디를 던졌다.
“판독하시는 교수님이 출근하셔서 다시 보셨는데, 게실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일반 장염이라고 합니다. 응급실에 계시는 전공의가 판독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대학병원에서 이런 오판을 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이런 드라마틱한 역전극이 일어난다는 자체가 현실 같지 않았다.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분명, 앞서 저자가 겪은 가족의 죽음, 질병, 가난, 고통 등은 분명 복은 아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이 같은 일들을 바라볼 때 한결같이 “복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겪는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한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 질서 안에서 아담이 지은 원죄로 인해 우리는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때론 다치고, 때론 병들고 그리고 죽는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그런 고난의 자리를 복의 자리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난을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 그렇게 내가 아닌 주님의 자리를 내어 드렸을 때 주님은 드라마틱하게 역사하신다. 저자의 삶에 이미 역사하셨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난에서 부요함으로, 질병에서 건강함으로 옮기신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죽음이 두렵지 않고 결국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저 천국 가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는 믿음을 갖게 하셨다. 주님을 따르면 우리의 현실에 깔린 짙은 어둠은 새벽빛을 더욱 찬란하게 할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영원한 밤이 아닌 빛을 위한 어둠이 된다. 결국 우리는 찬란한 빛을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복’에 대해서 묵상해 보면 결국 ‘복’은 고난의 정의를 변화시킨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소위 잘나가는 것도 복이지만 그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고난의 자리도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면 결국 그것은 ‘복’이 된다. 즉, 물질을 많이 받아서도 아니고 좋은 환경이 열려서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것, 그 자체가 ‘복’이 된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그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지 못한다. 고난이 그저 고난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주님을 만나기에 고난이 ‘복’으로 변화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감사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주님은 나병환자 열 명을 고쳐주신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한 명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인사를 드렸다. 예수님은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말씀하시며 그 이방인에게 치료를 넘어 구원까지 허락하셨다.
실제 필자가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고백하는 이유, 주님을 증거하는데 당당한 이유는 바로 주님이 나의 삶을 통해 몸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필자의 인생을 보면 도저히 하나님을 빼고는 설명이 안 된다. 그것을 스스로 알기에 큰 소리로 감격스러워하며 고백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사마리아인이 한센병이라는 고통에서 기적처럼 치료받고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큰소리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렸던 것처럼 말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현재 간증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주님이 주신 ‘복’에 대해서 간증을 하면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서 자연적으로 오는 대가라고 치부하거나 마치 무슨 이단에 빠진 것처럼 대한다. 아니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간증해야 한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세상이 정의한 많은 물질과 좋은 환경이 내게 이뤄졌다라는 사실이 아닌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 자체가 ‘복’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도 작은 목소리가 아닌 사마리아인처럼 큰소리로 소리치며 감사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물질과 환경에 따라 복을 받았다, 복을 받지 않았다라고 판단하기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는가 아닌가가 ‘복’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고난은 찾아오나 그 고난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목격하는가, 못하는가가 ‘복’의 기준이 된다.
우리가 복의 관점을 바꿀 때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로 변해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절대 나쁜 것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독생자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자체가 ‘복’이다. 우리가 이런 ‘복’을 누릴 때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감사를 믿는 우리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 나가서 소리치며 외쳐야 한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福音)이다.†

권혁중 (문화평론가)

프로피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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