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슬러 가문 대이은 헌신 ‘한국위원회’ 세워 기린다

작성일2020-05-29

프랜시스 킨슬러 선교사 가족이 1948년 10월 20일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미국장로교 여선교회가 마련한 작별행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킨슬러 선교사, 부인 도로시, 장남 아서, 차남 로스, 장녀 헬렌.

1929년 겨울, 평양 광명서관 2층에 남루한 행색의 소년들이 모였다. 초대한 사람은 프랜시스 킨슬러(1904~1992) 선교사. 그는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급히 모으다 보니 교육과정도 준비하지 못했다. 찬송을 가르치며 성경 이야기를 해줬다. 아이들은 선교사를 따랐고 금세 평양 시내에 소문이 났다. 모임은 점차 확대돼 성경구락부가 됐다.

성경구락부는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초등교육 과정을 밟는 청소년들의 모임이다. 구락부는 클럽(club)의 음역어다.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이 많지 않던 시절, 성경구락부는 기초교육을 위한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신학지남’ 33년 7월호에 “성경구락부는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부어주고 있다”면서 “아이들의 변화는 실로 놀랍고 경건한 종교심과 정직, 친절하고 정의감을 갖는 모습이 보통학교 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교과목도 국어 역사 지리 음악 체육 등으로 늘었다. 33년에는 중등교육과정을 신설했고, 38년에는 전국 수백 개의 성경구락부에 재학 중인 학생이 5000명을 넘어섰다. 성경구락부 사역은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중단된다. 진주만 공습을 준비하던 일제가 40년 킨슬러 선교사와 가족을 미국으로 추방했기 때문이다.

킨슬러 선교사는 일제가 패망한 후인 48년 한국으로 돌아와 성경구락부를 재건했다. 6·25전쟁 때도 일본으로 피난 가지 않고 군목 제도 창설에 기여했다. 미국장로교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54~55년 성경구락부는 전국에 1500여개가 있었다. 이들 성경구락부 중 일부는 정규 학교로 발전했다. 한국을 사랑했던 그는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킨슬러 선교사 부부의 유해는 2001년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이장됐다.

미국 시애틀에 사는 아서 킨슬러 선교사 부부.

그의 한국 선교 사역은 아들 아서 킨슬러 선교사에게 이어졌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72년부터 2011년까지 미국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헌신했다. 부인 신영순(수 킨슬러) 선교사와는 68년 결혼했다.

부부는 98년 미국장로교 선교부 관계자들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뒤 북한 주민 돕기에 나섰다. 2005년부터는 북한장애자보호연맹과 협력해 장애인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130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해 장애인들의 아픔을 싸매고 있다.

2001년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이장된 프랜시스 킨슬러 선교사 부부의 묘비. 국민일보DB

킨슬러 가문의 대를 이은 사역은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킨슬러재단(이사장 수 킨슬러)은 28일 서울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학술대회를 열고 한국위원회(준비위원장 유재무 목사) 창립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재단은 이날 한국위원회를 창립할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아서 킨슬러 선교사 부부의 방한이 무산되면서 잠정 연기됐다. 대신 정병준 서울장신대 교수가 ‘킨슬러 가의 한국 선교 사역’을 주제로 킨슬러 가문 선교 사역의 의미와 전망, 과제 등을 짚었다.

유재무 목사는 “성경구락부에서 시작해 북한 장애인 지원까지, 킨슬러 가문의 사역은 이 땅에 큰 흔적을 남겼다”면서 “코로나19 추이에 따라 조만간 정식으로 위원회를 창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40273&code=23111111&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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