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만에 꿈을 성취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

가난으로 낙심과 절망 희망을 잃었던 삶에서
주님이 보내주신 사람들로 작가의 꿈 되찾아

 


어린시절 우리 집 형편은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다. 가난에 찌들어 ‘오늘만 살고 그만 살까’하는 생각이 언제나 내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도 할 수 없었고 전자회사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학교를 졸업하고 싶어 밤에는 검정고시를 준비했지만 이른 나이에 남편을 만나며 끝내 마치지 못했다. 만약 내 인생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과 씨름하며 아무 꿈과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낙심과 절망이 아닌 꿈을 꾸고 살도록 세 명의 인도자를 보내주셨다. 나에게 처음으로 꿈을 심어준 사람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학교 글짓기 시간에 나의 재능을 알아봐주시고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나에게 “옥희야 너는 지금 할 수 없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나중에라도 작가가 되어라”고 말해준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50세가 넘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내 귓가에 맴돌아 작가의 꿈을 갖게 됐지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게 바빠 그런 꿈을 잊어갈 무렵 금천대교구 고순덕 권사님이 나를 교회로 인도했다. 권사님을 처음 알게 된 건 30여 년 전으로 둘째딸을 하루 봐준 스쳐가는 인연인줄로만 생각했던 권사님을 10여 년이 흘러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권사님은 교회 구역장으로 전도의 열정이 뜨거웠다. 나에게 매일 찾아와 전도를 하는데 처음에는 웃으며 응대했지만 갈수록 귀찮아져 그분이 오실 때쯤 불도 끄고 없는 척하기에 바빴다. 그런데도 어찌나 끈질기게 전도를 하는지 어느 날은 남편 집사님과 같이 와 성경 한권을 선물하셨다. 성경 값을 확인해 보니 3만원이기에 딱 3만원어치만 같이 가주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처음 예배에 참석하게 됐다. 예배를 드리는데 그 시간이 너무 편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에 나는 다시 한번 꿈을 꾸게 됐다. 내가 갖고 있는 꿈을 위해 만학도 학교에 입학했다.

 나를 전도하고 신앙을 심어준 것이 고순덕 권사님이라면 신앙이 꽃 피도록 도와준 분은 박분자 권사님이다. 만학도 학교에서 박분자 권사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국민일보 후원선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찬양과 봉사를 하면서 나의 믿음은 날로 좋아졌다. 주님을 알리는 게 기뻐 ‘행복으로의 초대’를 가지고 매일 전도도 하며 점점 믿음이 커지자 나의 꿈도 분명해졌다. 만학도 학교에서도 글쓰기 대회에 나가면 항상 입상해 초등학교 때 가진 작가의 꿈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나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현재 2학년에 재학 중이며 3번의 장학금을 받았다. 할렐루야!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오기까지 42년이 걸렸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마음이 많이 불안하고 흔들려 나는 우리 교구의 김현동 목사님에게만 이야기 하고 그 누구에게도 기도부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험날 갑자기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떠올랐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이 말씀에 따라 나는 자신 있게 시험을 보고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나중에야 김현동 목사님과 고순덕 권사님이 새벽부터 내가 시험 마칠 때까지 기도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심지어 고순덕 권사님은 그날 수능기도회에 참석해 학부형으로서 띠까지 두르고 기도하셨다는 이야기에 내 마음이 뭉클했다. 나에게 꿈을 심어주고 희망을 주는 기도의 어머니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낙심과 실망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나도 앞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가가 되어 예전의 나처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정리=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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