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탈북, 새터민 전도는 나의 사명

나는 57세였던 2005년에 아내와 큰 딸 그리고 7살 손녀와 탈북에 성공해 자유 대한민국 땅에 왔다. 이미 2000년에 둘째인 아들과 막내딸이 남한에 정착해 있었기에 가족의 재회는 눈물바다였다. 지금 돌아보면 탈북 과정과 남한 정착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은혜였다. 나는 19세에 공산당에 입당해 35년 간 기관차 수송을 담당했다. 중국을 오가며 외부 세계를 알게 됐고 1990년대 극심한 배고픔과 전염병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보면서 1998년에 탈북을 결심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아들과 막내딸을 먼저 남한으로 보낸 나는 남은 가족을 데리고 M국을 통해 탈출에 나섰다. 1차 도전에 실패해 중국 옌지로 송환되는 위기도 있었지만 다시 탈출했다. 죽음의 통로라 불리는 M국으로 향할 때 추격을 따돌리고 곳곳에 쳐진 철조망 25개를 넘었지만 갈 길은 막막했다. 먹지 못해 지쳐 쓰러진 어린 손녀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하늘을 원망했다. 굶주림 속에 이틀을 더 걷다보니 죽음이 눈앞에 와 있는 듯 했다. 그때 어디선가 ‘눈을 크게 떠 보라’는 음성이 들렸다. 힘겹게 눈을 뜨고 저 멀리 바라보았다. M국에 들어갈 수 있는 국경이었다. 하지만 일정 간격을 두고 5 높이로 세워진 시멘트 기둥 사이로 굵게 쳐진 철조망을 보자 절망스러웠다. 3월 초였지만 땅까지 얼어붙어 구덩이를 팔 수 없으니 절체절명이었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둥을 사다리 옆면 삼아 잡고 철조망을 타고 넘어가보자는 지혜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국경을 넘었고 날이 밝자 웅덩이에 쌓인 눈을 발견해 사흘 만에 해갈의 기쁨을 누렸다. 이어 M국 군인에게 발견됐고 몇몇 군인이 일행 중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자신의 외투를 기꺼이 벗어주는 선행을 보여 큰 감동을 받았다. 여러 관문을 거친 후 드디어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된 우리는 이것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건이었음을 깨닫고 온가족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

 나는 우리 교회 반석대교구 새터민교구에서 신앙생활하며 서리집사 직분도 받았다. 매주일 80여 명의 새터민과 예배드리며 양육 받고 있다. 새터민들은 복음 통일 후 북한 지역 곳곳에 퍼져 복음을 전할 마중물이다.

 나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만난 새터민 중 뜻이 같은 이들과 3년 전부터 북한 땅에 쌀 보내기를 실천하고 있다. 1.5ℓ 페트병에 쌀을 담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적힌 문구, 주님의 말씀이 담긴 USB, 구충제를 동봉한다. 페트병 겉에는 성경과 라디오가 젖지 않도록 단단히 포장해 이를 조석현상을 이용해 바다에 띄워 보냈다. 한번 보낼 때마다 700~800개의 페트병을 띄우는데 3년 동안 총 95회에 걸쳐 쌀과 전도용품을 보냈다. 새터민 중 이 쌀을 받아 보았다는 사람들을 지금까지 다섯 명 정도 만났다.

 나는 페트병을 바다에 띄울 때마다 ‘하나님! 이것이 북한 주민을 살리는 생명의 떡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주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며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할 것이다.

정리=오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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