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다는 아이를 둔 부모에게

작성일2019-01-27

문 : 평소에 아이 방 청소 같은 것을 안 해 주는데, 어쩌다 방문이 열려진 중2 딸아이 방을 보니 너무 지저분했어요. 그냥 정리만 조금 해주려다 아이의 연습장에 휘갈겨 놓은 메모를 보게 되었네요. ‘죽겠다,’ ‘죽고 싶다, ’사는 거 재미없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 방법들을 적어놓기도 해놓았네요. 그래도 이면에 ‘자살은 살인?’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보면 적잖이 안심되기도 합니다. 죽고 싶다는 아이,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답 : 정말 많이 놀랐을 겁니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아이가 죽음이란 말을 입에서 내뱉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럴만하지요. 그래도 어떤 통로를 통하게 되었든 딸아이의 메모나 일기장 같은 것을 보게 된 일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닙니다. 휘갈겨 놓은 연습장이든 예쁜 일기장이든 그것은 마음(감정)의 화장실입니다. 아이가 마음의 화장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 자기 마음에 생긴 부정적인 것 들을 쏟아내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 좋은 일입니다.
화장실은 기본적으로 냄새나는 곳이니 딸아이의 죽겠다는 말이나 누군가를 죽여 버리겠다는 표현은 마음의 똥을 질펀하게 싸놓은 겁니다. 죽겠다는 말은 주로 자신에 대한 감정이 부정적이란 뜻이고 죽여 버리겠다는 말은 그 대상으로 인해 화가 단단히 났다는 뜻입니다. 쾌변을 하고 나면 몸이 개운하듯 마음도 그렇게 표현하고 나면 속이 시원합니다. 그러니 우선은 너무 크게 걱정하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문 : 아이가 죽겠다는 것도 걸리지만 가끔씩 죽겠다는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저는 살아갈 의미를 잃게 될 겁니다. 저희 집이 지질이 가난하거나 어려운 형편도 아닌데. 그래서 아이는 지금까지 부족한 것 없이 자라왔는데 어쩌자고 그런 생 각을 하게 된 걸까요?

답 : 죽겠다는 표현을 하는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한다는 말은 그 생각을 짧게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연계하는 것은 자신의 푸념과 하소연을 받아주는 대상을 찾는 행위이고 그들과 마음이 통한다고 느끼기 때문일 겁니다.
‘죽고 싶다’는 너무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아직 제대로 정립을 못했다는 의미도 있고, 친구관계나 여타 다른 관계에서 어긋난 일들이 있어 마음이 아프고 힘들다는 의미도 있고, 어느 날 문득 세상을 살아갈 만한 능력이 없다고 느낄 때일 수도 있습니다.
감정은 날씨와 같기 때문에 부모가 생각할 때 충분히 넉넉한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특히 내면적 자신감이 턱없이 부족하면 이런 감정의 늪에 쉽게 빠집니다. 외면적 자신감은 집, 자동차, 부의 정도, 외모, 옷차림 등과 같은 것들이고 내면적 자신감은 스스로에 대한 기대, 능력에 대한 인정,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 추상적 사고의 깊이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내면적 자신 감을 갖지 못하면 생각의 깊이가 턱없이 얕아 죽고 싶다거나 죽여 버리겠다는 단정적인 표현을 씁니다. 그만큼 아직 어리고 또 여리다는 뜻이기도 하죠.

문 : 그렇다면 아이에게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저도 어릴 때 죽겠다는 생각은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딸아이처럼 저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진 않았거든요. 더구나 그때는 환경이 너무 열악해 사는게 너무 버거워서였지만 저 아이가 누리는 환경은 거의 공주님 수준이거든요.

답 : 내면적 자신감은 좋은 관계를 통해서 형성됩니다. 지금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대상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누군가입니다. 주관적으로는 많이 힘겨운 상태인데요, 그 대상이 엄마라면 더더욱 좋겠지요. 메모를 보았다는 뉘앙스는 풍기지 말고 자연스럽게 대화의 장을 만들어보십시오. 엄마가 자신이 쓴 메모를 보았다는 것을 알면 아이는 마음의 문을 닫을 것이고 엄마를 신뢰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쇼핑이나 영화구경, 가까운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꺼내시면 됩니다.
다만 그 날은 훈계가 목적이 아니라 엄마가 감정의 화장실이 되는 날이니 아이가 충분히 자기 이야기를 푸념하게 하십시오. 아이는 마음의 변을 쏟아내어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될 테고, 엄마와의 데이트를 통해서 아이는 자신에게 안전한(safety) 대상이 있다는 것을 재인식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을 지원해주는 지원환경 (support group)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죽고 싶을 위기도 살 에너지로 바꾸게 된답니다.†

이병준 목사
상담학 박사, 파란리본 카운슬 링&코칭, <다 큰 자녀 싸가지 코칭>, <니들이 결혼을 알어?>,
<우리 부부 어디서 잘못된 걸 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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