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욕망에 지친 영혼, 영원을 향한 회복의 삶

작성일2016-07-26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안식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받아 일을 하게 하심으로 인간을 잠잠케 하고 당신 자신이 직접 나타나 역사하심으로 영광을 홀로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정복하라 너희에게 온 세상을 맡기겠다. 그러나 동산 중앙의 실과는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것을 먹는 날에는 영원한 죽음이 있을 것을 경고하셨다. 이 말씀은 선악과를 먹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죽음 없이 영원히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었다. 말씀 속의 선악과는 소유와 청지기의 선택의 권리 즉, 자유의지의 인격체로서 인간의 자유가 갖는 권리와 책임의 양면성에 관한 기원이 담겨 있다. 여기서 동산 중앙의 실과인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 동산이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는 표시였다. 그 중 선악과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 주인이시며, 아담과 하와 즉, 사람의 신분은 권리와 책임의 양면성을 가진 청지기임을 기억케 하는 상징이었다.

그런데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는 아담과 하와가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써 사탄은 그들이 소유주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게 했으며 이 욕망의 결과는 엄청난 소유권 찬탈이라는 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님 소유권 찬탈은 죄의 시작이 되었으며, 이는 인간이 생명나무로부터 영원성을 잃어버림 받아 영원한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아담이 그 나무의 실과를 의식적으로 먹었다는 사실은 스스로 소유주가 되려했다는 증거였다. 결국 소유권에 대한 유혹은 죄와 함께 영원한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탄은 소유에 관해 두 가지 측면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첫 번째는 “육욕”이다. 이는 ‘인간이 자기욕구충족을 위하여 주변의 것들을 이기적으로 취하려는 마음’을 뜻한다. 이 육욕은 아주 아름답고 부드럽게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면서도 때론 절대권위를 부여할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이에 대해 시편기자는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시 106:20)라고 표현하고 있다. 천박하고 끔찍한 죄악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정욕”으로 ‘인간이 욕망하는 그 어떤 것을 당장 가져야겠다는 조급함’을 말한다.(오스왈드 챔버스의 <산상수훈> 중에서)


죄 이전의 ‘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청지기의 일’이었다. 하지만 죄 이후에 ‘일’은 인간이 문명의 진보라는 이름 아래 소유의 욕심을 채우려는 ‘일’로 변해버렸다. 야고보는 이에 관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의 ‘일’은 먼저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그리스도의 품성을 ‘쉼’(안식)을 통해 받지 않고 ‘일하는 자의 욕심’이 되어져 만족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소유욕망을 채우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과시(자기 의(義))하고자 한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 짐을 거부하는 행위로 나타나며 재물을 사랑하며 축적하기 위해 일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부정직하게 만들어가며 종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재물을 하나님보다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또한 일중독으로 인해 일 자체가 목적이 됨으로 하나님, 가족, 이웃관계를 해치며, 안식과 휴식을 갖지 못함으로 복된 삶을 파괴해 버린다.

우리 시대에 소유의 욕망이 낳은 지친 영혼을 회복하는 길은 없는가?
우리가 창조섭리의 첫 번째 축복인 ‘쉼의 정신’으로 조용한 침묵의 시간과 심령에 여백의 질서를 준비하며 우리의 시간들을 주님 앞에서 무시로 되돌아본다면 우리는 삶에 대한 자족과 범사에 감사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진지한 반성과 회개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쉼(안식)을 통해 행복의 에너지를 충전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쉼’은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는 축복의 시간 즉, ‘거룩을 재발견’하는 시간의 단초가 된다. 이렇듯 쉼은 몸의 피곤함을 회복하는 수단과 함께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놀랍도록 회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이러한 안식의 쉼은 ‘예배’와 연결되어진다.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건강한 신앙을 잃어가는 본질의 문제는 예배를 경홀히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참되고 진정한 예배는 우리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은혜와 평안을 제공한다. 그래서 이날은 복된 날이 되는 것이다.

쉼(안식)은 영적인 긴장을 요구한다. 이는 고요 속에 말씀과 기도 그리고 묵상을 통한 영적인 지혜의 얻음과 분별력을 가져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 가운데서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그 일을 행할 때에는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한 일이 아닌 전혀 새로운 차원의 능력을 힘입어 일을 행하는 것으로서 동일한 목표달성을 이루었지만 그 일은 순전한 주님의 영광을 들어낸 결과로 영원한 나라에 저축하는 상급과 연결되어지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과 일’은 자신의 행위에 의한 메마른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영원을 향한 회복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리로 하여금 안식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받아 일을 하게 하심으로 인간을 잠잠케 하고 당신 자신이 직접 나타나 역사하심으로 영광을 홀로 받으신다.†


정병일 l EPS청지기재정교실 대표,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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