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거인’의 인간적 면모 들여다보다

작성일2019-02-08

프랑스 느와용 장 칼뱅 생가에 전시돼 있는 위제 알라드의 작품 ‘성경의 무게’(1562년). 성경의 무게는 교황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기록한 책의 권위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국민일보DB

칼뱅/브루스 고든 지음/이재근 옮김/IVP

장로교회가 대다수를 차지한 한국교회에서 장 칼뱅은 어느 종교개혁가보다도 우뚝 서 있는 존재다. 한국에선 유난히 그의 신학적 성취와 업적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칭송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있다. 칼뱅과 동시대 활약한 정적들의 진술을 통해 칼뱅을 깎아내리는 시선이 상존하는 유럽의 상황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최근 번역 소개된 브루스 고든 예일대 신학부 교수의 ‘칼뱅’(IVP)은 칼뱅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탄탄한 고증과 균형 잡힌 서술을 통해 칼뱅의 삶을 이해하도록 돕는 평전이다. 고든 교수는 “불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16세기 사람이었기에 그 세계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고든 교수는 ‘새로운 스코틀랜드’라는 의미인 노바스코샤의 장로교계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대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16세기 취리히 종교개혁 당시의 치리와 교회 회의’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장로교회의 현재와 뿌리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시기 유럽 역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셈이다.

그런 이유로 고든 교수는 정확한 시대적 맥락과 문화 속에서 칼뱅의 삶을 비춰 읽어낸다.

16세기 프랑스와 스위스, 독일의 정치 상황과 ‘목사회’ ‘콩시스투아르’와 같은 제도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한다. 테오도르 드 베즈, 기욤 파렐, 하인리히 불링거, 필립 멜란히톤 등 칼뱅과 동시대를 살았던 종교개혁가의 활동상도 촘촘하게 엮어낸다. 덕분에 16세기 유럽 역사와 당대 종교개혁 지형도 위에서 칼뱅의 위치가 어디쯤이었는지를 파악하며 읽어나갈 수 있다.

칼뱅은 프랑스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피해 망명 생활을 택했고 신학적 근거를 갖고 싸우며 저술 활동에 힘썼다. 동시에 그를 미워하는 정적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렀다. 그가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타인의 신앙적 패배나 실패를 맹렬히 비난하는 신경과민적이고 까탈스러운 면모가 엿보였던 까닭을 알 듯하다.

무엇보다 칼뱅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일으킨 결정적 사건은 인문주의자이자 이단으로 몰렸던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처형이었다. 대부분의 칼뱅 지지자들은 이단 처형이 당연하다며 옹호했던 것과 달리 반대파들은 이를 문제 삼아 칼뱅을 학살자로 몰아 비판했다. 고든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피에르 카롤리가 칼뱅에게 가한 정죄 때문에 1530년대 제네바 종교개혁은 거의 무너질 뻔했고 칼뱅은 자기 평판을 바로잡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해야 했다. 초기 근대 세계에서 이단은 단순히 교리적 오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덕적 부패라는 낙인을 남겼다. 공동체에도 독을 퍼뜨렸다. 유일하게 알려진 치료법은 완전 박멸이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완전히 합의한 한 가지는 이단은 절대 용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390쪽)

섣부르게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보다 칼뱅의 선택을 어떻게 볼 것인지 독자 스스로 판단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린들 로퍼 지음/박규태 옮김/복있는사람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城)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으로 박는 모습이다. 다음은 독일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결연하게 “주님, 내가 여기 섰습니다. 나를 도우소서”라고 진술하는 장면이다. 실제 확인은 안 되지만, 그랬다고 전해지면서 정설처럼 굳어진 이미지다.

여기에 개신교 교리의 뼈대가 된 칭의론, ‘독일어 성경’ 번역, ‘오직 성경으로’ 정신, 성만찬 중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 안에 실제로 임재한다는 공재설을 더해보자. 그러면 종교개혁의 비장한 영웅이자 개신교의 위대한 아버지 마르틴 루터의 모습이 얼추 완성된다.

하지만 그의 실제 삶도 그렇게 위대하고 비장했을까.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혼돈의 시대를 그렇게 살아낼 수 있었을까. 린들 로퍼 영국 옥스퍼드대 역사학 흠정교수가 답을 찾아 나섰다. 로퍼 교수는 루터가 주고받은 각종 편지 모음집과 탁상담화 등 원전 자료들을 붙들고 10여년간 연구했다.

그는 서론에서 “나는 루터 내면의 풍경을 탐구하여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보는 우리 현대 이전 시대에 형성된 육체와 영혼에 관한 그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싶다”며 “특히 루터의 여러 모순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종교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루터라는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고, 그가 시대와 어떻게 조응했는지를 생생하게 되살려내려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주석과 참고문헌까지 790쪽에 달하는 책에서 만나는 루터의 모습은 포장되기 전, 날것의 느낌이 강하다. ‘까다로운 영웅’이었다는 저자의 말대로 매끈하고 잘 다듬어진 모습보다 뾰족하게 날이 서 있고 안팎으로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는 인간을 보게 된다.

어린 시절 그를 억압했던 아버지와의 불화, 평생 삶의 원동력이 됐던 분노, 한때 친구였더라도 마음이 뒤틀리면 가차 없이 돌아서서 퍼붓던 증오, 외설적이고 적나라한 수사에서 보이는 그만의 유머 등 약점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정서적 밑바탕이 있었기에 당대 로마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들고 끊임없이 싸우면서 살았던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여성으론 처음으로 옥스퍼드대 역사학 흠정교수가 된 로퍼 교수는 ‘사회사와 문화사, 페미니즘 운동으로 형성된 종교사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여성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던 루터가 결혼과 성생활에 있어 사회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주장을 펼쳐왔다며 “이 명백한 역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던 도전”이라고 밝히고 있다.

카타리나 폰 보라와의 결혼생활부터 여성과 성, 인간의 육체에 대한 루터의 생각을 상세히 되살려냈다.

이렇듯 16세기 독일 사회를 치열하게 살아온 루터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칭의론 등 루터 신학의 결정체들이 새롭게 보인다. 그가 외쳤던 신앙의 자유와 양심, 의롭다 하심으로 받은 구원과 은혜의 감격이란 곧 그가 피와 땀을 흘리며 온몸으로 살아낸 시대의 산물임을 깨닫게 된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60702&code=23111312&sid1=mcu&sid2=0002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