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그리고 깻잎 전

작성일2017-11-12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비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동생은 제 옆에
서 춥다고 했습니다. 동생과 저는 그때 초등학생이었고 목회하시던 부모님을 따라 경상도 산골에서 작은 교회 옆에 사택을 두고 읍내에 자리한 초등학교까지 매일 걸어 다녔습니다. 아침에 갈 때는 등교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열심히 걸어가니 한 시간 반 정도 걸렸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물고기 잡고 산열매 따먹는 즐거움에 몇 시간씩 놀면서 돌아오던 즐거운 그 길이 그날은 무척이나 멀고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형! 나 속옷까지 다 젖었어.” 울먹이는 동생의 목소리는 빗소리와 함께 더 슬프게 들렸습니다. 하늘은 검게 물들었고 비는 차갑다 못해 이제 아프기까지 했습니다. 비는 정말 속옷 속까지 파고들었고 신발은 걸을 때마다 질퍽거리다 못해 발을 짓이기고 있었습니다. 어디 비를 피할 곳도 없었습니다. 동생은 제 손을 더 세게 잡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손을 더 힘차게 잡아 주며 앞으로 계속 나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저기에 과수원이 보였습니다. 그 과수원은 제가 잘 아는 과수원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교회 장로님의 과수원이기 때문입니다. 탐스럽게 사과가 열리는 때면 어린 마음에 한두 개씩 서리해 먹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워낙 교회에서 무서운 장로님이셨기 때문에 저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얼른 지워 버렸습니다. 교회에서 만나도 항상 어려운 거리감을 좁힐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교회 강대상에 올라가다 혼나는 친구를 본적도 있고 주일 예배 시간에 졸다가 크게 혼나던 형들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갈등했습니다. 이 빗속을 헤치고 계속 길을 가야 할지, 아니면 어려운 저 장로님 댁에서 잠시 비를 피해야 할지를 말입니다. 그냥 갈까도 생각했지만 동생이 안쓰럽고 저도 너무 힘이 들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용기를 내어 제 동생 손을 장로님 댁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빗소리 때문에 못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래된 그 쇠문을 힘차게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과수원 옆 작은 집에서 장로님이 나오셨습니다. 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인사할 준비를 했지만 교회에서 보던 포마드 기름과 양복차림의 장로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주셨습니다. 편한 농부의 옷차림과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이 마음대로 헝클어진 장로님은 저를 보자마자 “아이쿠, 우리 작은 목사님 오셨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장로님은 우리가 요구한 것 이상의 필요를 아셨습니다. 비에 젖은 옷을 갈아 입혀 주시고 따듯한 아랫목으로 우리 형제를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장로님은 금방 딴 깻잎을 밀가루에 부쳐서 내오셨습니다. 정말 다른 것은 하나도 없이 깻잎에 간장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지난 사십여 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 보았건만 저는 아직도 그때 그 깻잎 전의 향과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사과 철이 아니라 맛있는 사과도 없고 집에 다른 먹을 것이 없다고 하시며 내오신 그 수수한 음식의 맛과 향은 어린 시절 한없이 어렵게 보였던 장로님의 모습을 새롭게 만나게 했습니다. 긴 기도와 엄한 목소리로만 기억했던 장로님은 그 소나기 내리던 날, 깻잎 전을 사이에 두고 오래전 일찍 돌아가신 우리 친할아버지, 그래서 기억에 도 나지 않는 그 친할아버지의 모습처럼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비가 그치고 옷이 적당히 마른 후, 우리 두 형제는 장로님 댁에서 나왔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생의 마지막 한마디는 아직도 기억납니다. “형, 장로님 정말 좋은 분이다. 그치!”어쩌면 오늘 당신의 삶에도 전혀 원하지 않는 소나기를 만날지 모릅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나의 몸에 갑작스런 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늘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뜻하지 않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으며 소중했던 사람이나 물건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나락에 떨어져 그동안 믿었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소나기가 우리의 삶에 들어와 우리의 삶을 어둡고 힘들고 차갑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까지 그 속에서 아프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가 기회입니다. 그 위기가 만나지 못했던 소중한 것과 잃어버렸던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만날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야말로 우리가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알았던 무엇인가를 벗을 수 있고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5월은 흔히들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잔인한 4월보다 5월에 더 많은 가족의 상처가 드러나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소나기를 피하지 말고 함께 맞으며 서로의 깊은 이야기 속으로 들 어가 봤으면 좋겠습니다. 눈물이 나더라도 대화를 피하지 말고 속상하더라도 끝까지 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어느 해보다 더 귀한 5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나기가 없었다면 깻잎 전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감사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부활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성경은 말합니다(롬 5:20). 소나기만 만나지 말고 깻잎 전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삶이 더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지길 소망합니다. 오래전 과수원에서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먹었던 깻잎 전이 유난히도 생각납니다. 그 장로님도 그립습니다.

지금 당신 옆에 있는 그 소중한 것들을 만나 보십시오. 오늘은 깻잎 전을 한번해 먹어야겠습니다.†

강산 (목사)

십자가 교회 , <나는 진짜인가? >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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