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작성일2017-02-23

“세 사람한테 물건 팔았으니 받은 돈이 뻔하거든요. 그런데 만 원짜리 세 장이 더 있으니 돈 더 주고 간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타겠어요. 아까 그 할아버지가 아닌가 싶은데…. 늙으면 눈도 다 소용없다니까요. 천 원짜린 줄 알고 만 원짜리 받은 나도 눈 뜬 장님이지요.”



수유역 지하도를 빠져나온 정수 씨는 까칠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거리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 할머니가 지하철 출입구에서 양말을 팔고 있었다. 정수 씨는 가던 길을 멈추고 양말 파는 할머니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양말 좀 사가세요.”
정수 씨는 양말이 널려 있는 파란색 비닐포대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얼마예요, 할머니?”
“한 켤레 천 원밖에 안 해요. 몇 켤레나 드릴까요?”
“잠깐만요.”
정수 씨는 수북이 쌓여 있는 양말을 뒤적거렸다. 그때 한 노신사가 정수 씨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할머니, 이 양말 얼마지요?”
회색 코트에 중절모를 쓴 노신사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한 켤레에 천 원이에요. 보기엔 이래도 아주 좋아요.”
“그래요? 그럼 열 켤레만 싸주시죠.”
정수 씨는 노신사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눈썹까지 하얗게 눈이 내린 노신사는 세월의 선물인 것처럼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할멈 없이 혼자 사니까 매일 양말 빠는 것도 일이더라구요.”
“네에. 그러시겠지요.”
“많이 파셨어요, 할머니?”
“웬걸요. 낮에 아들네 집 다녀오느라 이제야 겨우 나왔는걸요.”
“힘들진 않으세요? 연세도 많으신 것 같은데.”
“왜 안 힘들겠어요. 근데 젊어서부터 해온 일이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길거리에서 고생하는 사람이 한 둘인가요.”
“그거야 그렇지요.”
노신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돈을 셌다.
“열 장 맞을 겁니다. 늙으니까 눈이 어두워서 돈 세기도 힘들어요.”
“맞겠지요, 뭐.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네.”
노신사가 가고 난 뒤 정수 씨는 양말 세 켤레를 샀다. 그리고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친구를 기다렸다. 친구는 한 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창밖은 어둠이 짙게 깔렸다. 정수 씨는 이따금씩 지하철역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양말을 파는 할머니는 거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수 씨에게 일자리를 구해주기로 한 친구는 아홉 시가 넘도록 오지 않았다. 정수 씨는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정수 씨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하철역까지 왔을 때 할머니가 양말을 싼 보따리 위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다람쥐처럼 웅크리고 앉아 발바닥을 주무르고 있었다.
“들어가시게요, 할머니.”
“네. 들어가려고요. 근데, 돈 임자가 안 와서 어쩌죠?”
“돈 임자라니요?”
“세 사람한테 물건 팔았으니 받은 돈이 뻔하거든요. 그런데 만 원짜리 세 장이 더 있으니 돈 더 주고 간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타겠어요. 아까 그 할아버지가 아닌가 싶은데…. 늙으면 눈도 다 소용없다니까요. 천 원짜린 줄 알고 만 원짜리 받은 나도 눈 뜬 장님이지요.”
졸음을 쫓으며 할머니가 정수 씨에게 말했다.
“할머니, 언제까지 기다리시려고요.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그럼 안 되지요. 우리 막둥이가 학교 선생님인데 내가 기다려야지요.”
할머니는 길게 하품을 하며 야윈 몸을 움츠렸다. 정수 씨는 더 이상 어쩌지못하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왔다. 정수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양말 파는 할머니에게 준 만 원짜리 세 장은 천둥치는 세월을 살다가신 어머니에 대한 속죄였다. 정수 씨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눈물 젖은 어머니가 정수 씨 가슴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어머니. 스무 살 아들은, 이제 불혹을 넘겨서야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시장 바닥에서 콩나물을 팔며 감옥에 있는 아들 뒷바라지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랑을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요.’
눈물 흘리는 정수 씨 앞에 어머니 모습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다가서면 멀어지고 다가서면 또 멀어지면서 어머니는 희미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철환 (소설가)

작품으로는 430만 명의 독자들이 읽은 <연탄길 1,2,3>과 <행복한 고물상>과 <위로>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등 총 23권이 있다. 작가의 작품 중 총 10편의 글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고, 뮤지컬 연탄길 대본은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2000년부터 책 수익금으로 운영해 온 ‘연탄길 나눔터 기금’을 통해, 낮고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