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만나다

작성일2017-02-10

최근에 “유혹”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담은 한 교수님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교수님은 한국교회가 외부의 고난이나 시련은 없어졌지만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점점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지적하며 그런 기독교를 개탄했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신랄한 비판에 이어서 유혹의 시대를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저자의 실제적인 도전이나 방향을 기대하며 책의 후반부로 달려갔다.

그러나 수십 페이지에 걸쳐서 비판과 문제점을 제시하던 저자는 단순히 “예수님처럼 살면 된다”라는 짧은 글로 급하게 책을 마감해 버렸다. 솔직히 너무나 허탈했다. 병원에 갔는데 환자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만 장황하게 늘어놓을 뿐, 결국 해결책은 “건강하게 살면 된다”는 식의 처방만 받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어떻게 이런 유혹을 이겼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었다. 그래서 실제적인 지침도 전혀 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책에는 모조리 남의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최근에 업데이트가 된 한 기사를 보니 그 책의 저자인 신학교 교수님이 자신의 교수 보직을 유지하려고 세상 법정에 소송까지 한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가 자기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걸다니… 나는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을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 “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라는 내용이 생각났다. 그 자세한 내막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1년에 수억의 연봉을 받는 그 교수께서 청렴과 청빈을 말할 자격이 되는지에 대해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선지자적인 음성을 내고 싶다면 선지자적인 삶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정보의 시대, 인터넷과 책에서 좋은 말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이다. 사람들은 좋은 강의를 듣고 감동적인 설교를 찾지만 삶이 되지 않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무엇보다 삶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는 이 비극적이고 가식적인 방식을 빨리 바꾸어야 한다. 기도에 대한 책을 수 백권 읽는 것보다 한시간이라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며 예배에 대한 강의를 수십 시간 듣는 것보다 졸지 말고 깨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크게 말하기보다 구체적으로 살아야 하며 많이 비판하기보다 작게라도 순종해야 한다. 삶이 없다는 것은 일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볼 필요가 없다. 자신을 보면 알게 된다. 오늘이라고 부르는 지금, 내가 육신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처한 현실과 상황과 모습은 어떻게든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다. 깊은 기도와 영적인 기도가 없는 것은 그동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말씀만 들으면 조는 이유는 정기적으로 말씀을 읽지도 않고 읽은 말씀을 심령 깊게 받아들여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적인 방법이 나오는 이유는 늘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왔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돈과 세상을 신으로 섬겼기 때문이며, 불평과 원망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감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활의 생명이 누려지지 않는 것은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이며 성령충만 하지 않은 것은 성령님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살아온 삶의 결과가 지금 누리는 삶의 현실이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은 교회의 담임목사인 나는 성도님들이 매주 결단과 감동을 삶으로 옮기라고 주보에 여백을 남겨 놓는다. 매주 주보에는 ‘오늘 깨달아진 것을 구체적으로 삶에서 어떻게 적용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이 선명하게 쓰여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성도님들이 그곳에 아무것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일부 쓰는 성도님들도 매우 추상적으로 “무엇을 깨달았다”는 식의 글만 남길 뿐이다. 아니다! 그렇게는 백년을 예수 믿어도 절대 더러운 성질이 죽지 않고 악한 습관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환경만 바꾸려고 하고 문제만 해결하려고 할 뿐 절대존재의 변화를 이룰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체적인 삶으로서의 적용을 결단하고 실천해야 한다. ‘거룩하게 살아야겠다’든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적용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으로 적고 살기를 점검해야 한다. “나는 이번 주에 누구에게 무엇을 하겠다” 혹은 “나는 얼마를 어떻게 사용하겠다” 혹은 “나는 몇 시에 어디서 이것을 하겠다” 혹은 “하지 않겠다”라는 실제적인 순종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마귀들의 오랜 전략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감동도 받게 하고 도전도 받게 하지만 절대로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지금도 엄청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한 주간 갑작스럽게 허리를 다치면서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긴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병원 진료가 마치면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와야 했다. 목요일 오전, 나는 택시에 타자마자 택시 앞에 붙여진 한 글을 보게 되었다. 2006년9월 17일에 태어난 김성진이라는 아이가 희귀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글이었다. 내 생일이 9월 17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 아이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안타까움과 연민이 올라왔다.
나는 택시를 타는 내내 나의 아픔을 잊고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아파보니 아픈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성령님께 기도했다. 집 앞에 택시가 섰고 요금은 4천원이 나왔다. 나는 지갑에 있는 전 재산 만원을 내며 그 기사님께 말씀드렸다. “기사님 잔돈은 성진이를 위해 꼭 사용해 주세요. 성진이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원래는 남은 돈으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주님께서 주신 감동에 순종하였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누군가 말한 것처럼 모두 “동사”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고 느낌만 가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자리마다 “삶”을 넣어도 될 것이다. “삶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깨달았느냐?가 아니라 결국 “얼마나 살았느냐?”가 마지막 순간에 점검받게될 것이다. 살아내지 못한 진리는 냉장고 안에 두었지만 먹지 못하고 썩는 음식이 될 것이다. 살아낸 것만이 결국 생명이 되고 열매가 되고 천국이 될 것이다.†

강산 (목사)

십자가 교회 , <나는 진짜인가? >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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