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나이 수업’] 나이에 맞게 잘 사는 지혜를 배워라

작성일2019-06-28

<일러스트=이영은>

하얀 도화지 위에 네 사람의 손을 나란히 혹은 서로 엇갈리게 놓고 손 모양 그대로 따라가며 연필로 그리기 시작한다. 좁은 책상 위에서 머리를 맞대고 한 팀이 되어 열중하다 보니, 처음 인사 나눌 때의 어색함은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번갈아 상대방의 손을 그려주며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어서 살구색 수채화 물감으로 자유롭게 자기 손을 색칠하고는 손톱이며 주름, 검버섯, 점, 반지나 시계 등을 그려 넣는다. 그러고는 색연필과 색깔 사인펜으로 알록달록 손톱을 칠하고 반짝이 스티커를 여기저기 붙여서 맘껏 꾸민다. 한쪽에서는 별 모양 스티커를 이어 붙여 팔찌를 만들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하트 모양 스티커를 이어 붙이니 마치 손가락 끝에서 사랑이 꽃처럼 피어나는 것 같다.

뒤늦게 한글을 배우는 여자 어르신들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손 그림을 직접 그리고 꾸며 본 소감을 여쭈었더니 앞다퉈 태어나 처음으로 붓을 잡고 물감칠을 해봤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공부가 참 좋은 거라고, 한글반에 다니다 보니 이렇게 그림을 다 그려본다고, 신기하고 고맙다고 하셨다.

어르신들을 도우며 신나게 손 그림을 그리던 대학생 자원봉사자들 사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수채화 물감도 반짝이 스티커도 오랜만이라며 왁자지껄 재밌어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붓을 만져본다는 어르신들 말씀이 가슴에 가서 탁 얹히는 순간이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림 속 나의 손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니 어떤 생각이 드는지 질문을 이어갔다. 어르신들의 손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다들 마디가 굵었고 손가락은 휘었으며 손톱은 대부분 갈라졌고 살결은 거친 데다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했다.

“이 손으로 안 해본 일이 없지 뭐.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기르느라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손이 이렇게 망가져 버렸네. 지문이 다 닳아 없어져서 주민증 낼 때 애먹었어. 하도 못생기고 남자 손 같아서 어디 가서 내보이기 부끄러워. 내 몸 중에서 제일 고생했지. 그래서 미안하고 고마워. 매니큐어도 한 번 발라본 적 없는데 오늘 빨갛게 칠하고 반짝이도 붙이니까 좀 낫네. 그래도 이 손이 있어 이만큼이나 먹고 살았으니 장하지 뭐!”

어르신들 말씀에 푹 빠져있다 눈을 돌리니 어르신들을 둘러싸고 앉은 대학생들이 다들 어르신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거친 손등을 하염없이 쓰다듬어 드리는 학생들도 몇몇 눈에 들어왔다.

‘나이 수업’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사람이 세월과 함께 나이가 들면 변화가 일어나고 그에 따라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책이나 강의로 배우고 익히는 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나이 듦을 온몸과 마음으로 살아내고 있는 어르신들과 직접 만나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그들의 삶에 잠깐이나마 귀 기울이는 일이 훨씬 더 생생한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간힘을 쓴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맨발로 달려나가 남들보다 앞서 맞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닌 나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모두에게 똑같이 더해지는 한 해 한 해가 모여 지금의 내 나이를 이루었기에 내 나이에 맞게 잘 살아가는 게 가장 좋은 일이리라.

나이 들어 조심스러워지고 뒤로 물러서게 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젊어서는 보이지 않고 미처 가 닿지 못하던 성숙한 생각과 판단을 하는 때가 있다. 나잇값 못해 스스로 부끄러운 순간도 있고, 여전히 열정이 남아있어 가슴 뿌듯한 시간도 있다. 세상 모든 일에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나이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 약해지는 몸과 마음과 정신력을 그림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런데도 겸손하고 온화한 빛을 지닌 어른이 되고자 다시 한번 마음먹는다. 이 모두가 나무뿌리같이 울퉁불퉁하고 거친 손으로 처음 붓을 잡고 떨리는 마음으로 색칠을 해나가던 어르신들께서 내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앞으로도 인생의 선배님들을 보며 노년으로 향하는 길을 묵묵히 그러나 한 걸음씩 정성껏 걸어가리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해주시는 나이를 제대로 살아내는 일이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때까지 나의 하나님께 노래할 것이다. 내 묵상을 주님이 기꺼이 받아주시면 좋으련만! 그러면 나는 주님의 품 안에서 즐겁기만 할 것이다.” (시 104:33~34, 새번역)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84064&code=23111413&sid1=mco

유경 (어르신사랑연구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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